한줄 詩

작부를 위하여 - 홍성식

마루안 2018. 6. 11. 22:25

 

 

작부를 위하여 - 홍성식

 

 

공복에 들어부은 독주인양

내게 쓰라림의 구멍만을 남긴 그녀들은

후배의 착한 아내가 되거나

친구들의 얌전한 정부(情婦)가 되었다

 

하얀 아이의 동정을 돌려가며 능욕한

윤간의 세월

넓은 방에서 새우잠을 자며

기꺼이 구차하고자 했던 나날들

새벽이면 꿈인지도 모르고

창가를 우울하게 서성이는 아버지를 만났다

 

느끼는 자에게 세상은 얼마나

크나큰 어두움의 묘지인가

기어나오려 할수록

제 풀에 발목을 잡히는

 

하여, 비로소 바로 보이는 생을 자축하며

오늘은 해가 채 기울기도 전부터

다음날 새벽달이 사그라질 때까지

영자거나 미숙이란 이름을 가진

작부를 끌어안고

깍뚜기에 깡소주를 마시고 싶다

 

한때 뜨거운 언어를 가졌던 손으로

낡은 지전(紙錢)에 침 뱉어

그네들의 가난한 속옷 속으로 쑤셔 넣고

소설책 한 권은 족히 될

신파조의 설운 사연을

거짓 이름으로라도

함께 눈물 글썽여 주고 싶다

 

 

*시집, 아버지꽃, 화남

 

 

 

 

 

 

그녀 등 뒤의 칼자국 - 홍성식

 

 

이십 팔 년, 풍파가 훑고 간

그녀 몸은 폐허

폐선(廢船) 위에서 하룻밤을 묵어간

사내들은 모조리 상처가 되었다

좁은 방 바깥엔 쌀자루 가득

혼곤한 소주병

취한 몸 지긋지긋 더듬던

뜨뜻미지근한 성교의 기억

 

십이 년 작부로 곪아

할멈의 그것처럼 늘어진 젖

위궤양 쓰린 속을 쓸어 내리며 깨어나는

새벽은 참혹하다

팔을 비틀며 따귀를 날리거나

멀쩡한 목을 부러뜨리는 패악 없이도

생이란 고문 같은 것

 

류머티스 관절염의

뻐근한 무릎을 스스로 주무르면

놀라워라, 찔끔 눈자위가 시큼거리고

아무도 없는 방이 서럽기 그지없다

깨진 재떨이 사금파리로 킬킬대며

등에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던

살모사 문신의 그 사내까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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