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미 - 장만호

마루안 2018. 6. 11. 22:40

 

 

거미 - 장만호


제대로 삭지 않은 것은 부끄럽다

이제는 가난하지 않아도 좋은 시절
그러나 산다는 것은
바닥을 벗어나는 끝없는 행려
너는 세상의 낮은 지붕
집을 엮는다

서툰 비질에도 쓸려가던 시간을 견뎌
한 뼘의 햇빛으로 빛나는 투명한 방들과
그 사이를 넘나드는 어린 소망들
네 여린 등 위의 아이들

그러나 누이여 잊었는가
허름한 줄을 타고 너 어리게 떠돌던 바닥
누구나 제가 삭여야 할 세월은 있어,
네 마음속 그 많은 방들을 거두라

세간의 바람에나 비질에 떠밀리겠지만
이 바닥을 건너 너의 자식들
저만의 집을 엮을 것이다 투명하도록 빛나
해지지 않을 집을


*시집, 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


 




불면증 - 장만호 


이런 날 불을 켜지 않은 방에 앉아 있으면
커다란 뒤주 속에 있는 것만 같아
어둠의 알갱이를 나는 만질 듯한데
간혹 창문을 바라보는 거 있잖아
새벽 세 시의 창밖을 바라보는 거 말야
어둠의 알갱이를 만지다
내가 곤두선 밥알처럼 단단해질 것 같은,
누에고치처럼 말야
이런 새벽이면 한 가닥 실을 잡고 잠들면 좋겠어
네가 다른 한쪽을 잡아당기면
가늘지만 끈끈한 그 실을 타고 꽃들이 내려갈 것이고
더는 내려갈 수 없는 곳에서
꽃들은 네 옷 위로 피어나겠지만
그러면 내가 미이라처럼 발굴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나는 잠들지 못하는 푸른 잠(蠶)이고,
비단이 되지 못하는 뒤주 속의 시간이고,
순장할 수 없는 새벽 세 시의 달빛이고,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낮 열두시부터 한시 사이 - 박남원  (0) 2018.06.11
자화상 - 박노정  (0) 2018.06.11
닷새 장날 - 홍신선  (0) 2018.06.11
작부를 위하여 - 홍성식  (0) 2018.06.11
단비에게 - 조기조  (0) 2018.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