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비에게 - 조기조

마루안 2018. 6. 11. 22:16

 

 

단비에게 - 조기조


단비야
너도 크면 공장에 다니겠지
이 아빠처럼
단비야 너도 크면
사랑을 배우겠지 미움도 배우겠지
아빠가 남긴
못 다한 사랑 못 다한 미움
단비야 너도 크면
싸워야 할 일들이 많겠지
얼싸안고 기뻐 울 날도 많겠지
네 또래 세상이 오면
그땐 단비야 네 갈 길
앞만 보고 똑바로 가는 거다
뒤에서 자꾸 누가 불러도
아무리 그리운 것들이
불러도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아빠처럼
돌기둥이 된다.

 

 

*시집, 낡은 기계, 실천문학사

 

 

 

 

 

 

낡은 기계 - 조기조


눈구멍과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와 치아에 말라붙은
기름 자국 위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더 이상 돌지 않는
낡은 기계

철의 골격으로
신념이라기보다 천성으로
육중한 삶의 무게를 버티며
우주의 원리를 닮은
무한한 회전운동을 얻어내던
그러므로 삶은 원심력의 긴장임을 보여주던

그러나 이젠 낡은 기계
어떤 원리도
긴장도
치밀함도
정교함도
당당함도
다 내팽개친 기계의 정지

온몸에 녹물을 줄줄 흘리며
피눈물을 질질 흘리며
명상에 정진하는
맹렬한 정지에 집중하는
그러나 낡은 채로라도 다시 돌아보자는
망상으로 떨어지지 않는
낡은 기계.

 

 

 

 

# 조기조 시인은 1963년 충남 서천 출생으로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낡은 기계>, <기름 미인>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닷새 장날 - 홍신선  (0) 2018.06.11
작부를 위하여 - 홍성식  (0) 2018.06.11
벽장 유감 - 박순호  (0) 2018.06.11
함박꽃 한때 - 권영옥  (0) 2018.06.11
고아(孤兒)가 아닌 나 - 이철경  (0) 2018.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