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닷새 장날 - 홍신선

마루안 2018. 6. 11. 22:37

 

 

닷새 장날 - 홍신선

 

 

한 귀퉁이 깨진 텅 빈 플라스틱 의자에

색깔 바랜 시간이 앉아 기다린다.

마을로 가는 군내 버스는 몇 시 차인지

얼마쯤 기다려야 하는지

 

찌들고 겉늙은 저 아낙이 뜯던 무른 빵 조각처럼

건너편 차고지 위에 구름이 떴다. 구름이 하늘을 꾸역꾸역 뜯어먹는 중이다.

정체인가? 허구리 움푹 꺼진 검정 비닐봉지를 든

매지구름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지나간다.

거기도 제분소 농약사 다방 이용원들이 비좁은 골목을 만들어

낮은 어깨들 부딪고 섰을까 닷새장이 설까

 

해 질 녘 차에는 병원 왔다 가는 늙은 아낙들뿐인데

버스 타고 가는 동안 안내 방송 나오면

각자 뿔뿔이 제 몫의 시간에서 하차할 뿐인데

나 역시 과연 어느 방면 얼마를 더 가야 내릴 건지

 

하는 막막함에 갑자기 목이 컥컥 마렵다

실토할 것 토할 일도 없는데 웬 서글픔 덩어리인가.

건너편 간이 건물 어깨를 짚고 딱하다는 듯 넘겨다보는

가슴에 이내를 띠 두른 여름 산과 그 뒤 여름 산.

 

기다림이 사는 일이어서 그냥 기다리는 일로

분주한 읍내 종합 버스 터미널.

 

 

*시집/ 직박구리의 봄노래/ 출판그룹파란

 

 

 

 

 

 

우두커니 - 홍신선

 

 

우두커니 늦여름 뙤약볕 속에 물꼬 건사한 뒤 서 있는 삽 한 자루.

 

신새벽 골목길 청소차 지나간 뒤 찌그러진 양은 냄비 전두리에

우두커니 말라붙은 라면발 한 가닥.

 

우두커니 늙은 엄마 손에나 끌려가는 정신 성치 않은 반편이 중년 아들.

 

풀 베고 난 밭두둑 뭇 풀벌레마저 장애로 만든 죄는 어느 누구에게 빌어야 하나

우두커니 허공에 떠도는 혼이 나간 모빌 기름내 긴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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