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느림에 묶이다 - 이강산

마루안 2018. 6. 11. 21:37

 

 

느림에 묶이다 - 이강산


장돌뱅이 톱장수 아버지 따라 코 흘리며 첫발 딛곤 느릿느릿 걷다보니 아직 오일장 장터
가짜 순대 가짜 좀약 가짜 비너스브라자 가짜 세월의 난장판
그 틈바구니,

닷새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막걸리 한 대접으로 끝나냐, 종점다방이라도 가야지
생강들, 간고등어들, 내 손목 끌어당긴다
흉금 털자는 듯, 이대로 작파하자는 듯 시장 바닥에 주저앉는다

누가 누구를 앞서 걸은 적 없는 방물장수태극기 마른멸치 논산순대 봄똥 참나무괭이자루
늘어선 그대로 뒤뚱뒤뚱 따라만 가는 강씨 임씨 마산댁 뻥구네 아랑이엄마 평국이삼촌

너나없이 뽕짝처럼 흘러가는 파장,
느려터지게 살아서 회갑도 못 맞은 큰누님, 서른댓 명은 지나쳐야
은근슬쩍 장터를 벗어나는,


*시집, 모항, 실천문학사

 

 

 



모항(母港) - 이강산


바다는 모두 떠나보내고 일몰만 남겨두었다
바다는 잘 익은 감빛이다

겨울 바닷바람에 떨며
나는 저 바다의 숲 왼쪽 모퉁이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감나무 아래 장독대가 있고 앞바퀴가 휘어진 자전거 옆에 쭈그려 앉은 사람이 어머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나는 방바닥으로 뚝뚝 햇살 방울이 듣는 붉은 기와집, 옛집 풍경의 갯벌 속으로 빠져들 것이고
그러면 엊그제 마지막 남은 앞니를 뺀 어머니가 나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릴 것이다

보일듯 말듯, 한 번도 골짜기를 보여주지 않는 바다
한 번도 골짜기를 들여다보지 못한 어머니

그러나 뒤꼍 귀뚜라미 울음 같은, 그 어렴풋한 말이 무슨 말이든 나는 다 알아들을 것이므로
짐짓 못 들은 척 감나무만 바라보다가
나 홀로 서해까지 달려온 내력이라도 들킨 것처럼 코끝이 시큰해지다가

우우우,
원순모음이 새나오는 어머니의 닭똥구멍 같은 입 속으로 피조개빛 홍시 몇 알 들이밀 것이다

―마포에서 탈출한 곰소 남자, 생의 절반을 잘라냈어요
―지금쯤 청양 외딴집의 여자 가수는 밤바다를 노래하고 있을 거예요
―다들 감나무만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바다는 일몰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았다
나는 저 바다의 숲 어딘가 틀림없이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이강산 시인은 1959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母港>이 있다. 소설가, 사진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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