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귀를 만들어 달아 드리다 - 김선향

마루안 2018. 6. 11. 21:40

 

 

귀를 만들어 달아 드리다 - 김선향


두루마리 베고 모로 누워
<가요 무대>를 보시는 어머니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요만은-

아이들과 어머니를 번갈아 가며 부채질하다가
난생 처음 찬찬히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귀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내 어머니 박복(薄福)의 기원이란
못난 저 놈의 귀 때문이렸다!
면도칼로 귀를 도려내 베란다 밖으로 냅다 던져 버리고
햅쌀을 빻아 송편을 빚듯 귀를 만든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빛이-

어여쁜 귀 한 쌍을 양 쪽에 달아 드리니
그럴 듯, 그럴 듯해
선잠을 자던 어머니 마음에 드시는지 희미하게 웃으시네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시집, 여자의 정면, 실천문학사


 




은백색의, 아니아니 누런, 노파들 - 김선향


생선 가운데 토막을 건져 넌지시 아들 국그릇에 넣고는
생선대가리를 쭉쭉 빨아가며 손가락으로 발라먹는 당신

딸이 마련해준 실버보행기는 환불하고
뼈만 앙상한 유모차를 밀며 노인정으로 가는 당신

제발, 아무 데나, 빼놓지 말라는 며느리 지청구를 듣는 아침
틀니를 끼우며 고개를 못 드는 당신

무임승차권을 얻어 지하철을 타고 종일 서울을 순환하는
버스 종점 같은 얼굴의 당신

옥매트나 키토산을 판매하는 자리에 출석 도장을 찍고
두루마리 화장지를 공짜로 받으며 뻘쭉하게 웃는 당신

치과 문턱은 얼씬도 못 해본 채
썩은내 진동하는 입을 앙다물고 있는 당신

산동네 쪽방에 누워
자원봉사자의 도시락을 사뭇 기다리는 해골 같은 당신

겨울비 고스란히 맞으며 폐지더미 리어카를 끌고
내리막길을 가는 당신


 


*시인의 말

무모함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말문이 막혔던 긴 시간을 건너
노래가 되지 못한 웅얼거림들을
겨우 펼쳐놓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시만이 내게 남겨졌다.
시라는 '외줄'에 매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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