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등대 이발관 - 신정민

마루안 2018. 6. 11. 21:54



등대 이발관 - 신정민



김제평야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이발관이 있다

누렇게 익어 출렁이는 바다

퇴역한 늙은 등대지기

이발관을 열었을 때

그만 바다가 되어 버린 평야가 있다


세월 벗겨진 간판에 삐뚤어진 필체로 쓴 이발관

창문에서 뻗어 나간 불빛이 파도의 머리카락을 자르면

지나는 바람 소리에 서걱대는 가위질 소리 묻어났다


그리움이 해일처럼 일어서는 저녁

풍랑에 흔들리는 논둑 끝에

두어 채의 집이 달빛에 걸려 글썽였다

돛을 펄럭이며 돌아오는 노을, 이발관 창문에 철썩이고

누군가의 노크소리였다가

때론 이발사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는 파도소리

환청에 익숙한 적막을

늙은 이발사는 마른기침으로 떨쳐냈다


하늘 반,

김제평야 한가운데

난바다의 머리를 다듬는 이발관이 있다



*시집, 꽃들이 딸꾹, 애지








희망여인숙 - 신정민



범일동 재래시장통에 있는 희망여인숙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길옆에 늘어선 간판과 가게들을 지우고

이 길이 50년 전에 기찻길이었다는 당신의 말을 떠올려야만 한다

시장통에 레일이 다시 그려지고

손꼽아 기다리던 완행열차가 달려와야 한다

까까머리 병사들과 군수품을 실은 기차가 서서히 들어오면

골목에서 뛰쳐나온 아가씨들 손을 흔들고

히죽히죽 웃어대는 어린 병사들의 얼굴이 보여야 한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희망이라는 말, 간판 앞에 떡 버티고 있는 곳

지금이 50년 후라는 것을 잊어야 한다

연분홍 치마를 입고 여인숙 앞에서 서성거리는 저 여자

멀리서 봐도 소싯적엔 아리따운 처녀였을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여자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저녁거리 사들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 지우고

바람결에 펄럭이는 청과상 천막마저 지우고 나면

간신히 남아 있는 희망여인숙,

범일동 재래시장통에 있는 희망여인숙에 대해 말하려면

희망이란 말 밖에 보이지 않는 나를

제일 먼저 지워야 한다






# 신정민 시인은 1961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꽃들이 딸꾹>, <뱀이 된 피아노>, <티벳 만행>, <나이지라아의 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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