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대야(大野) - 김수우

마루안 2018. 5. 28. 21:52



대야(大野) - 김수우



산복도로 골목, 고무대야와 플라스틱 상자들
긴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키운다
모퉁이마다 식구로 모여 앉은 연둣빛


파 상추 웃자라는 텃밭이 목숨처럼 깊으니
동백 산당화 심심한 정원이 꿈처럼 넓으니


스티로폼 화분에 담긴 영선동
잎과 뿌리들이 당기는 골목길 팽팽하다
단칸방이 하늘이던 어제나, 하늘도 단칸방이 되고 마는 오늘이나
한 켤레 슬리퍼로 끌고 가는
그들의 자연주의


새파란 물탱크 하나씩 끌어안고 늙어버린 계단들, 슬레이트 그늘을 따라 뭉툭뭉툭 덩어리진 그들 고집만큼
찬란한
대야, 大野들,
고무대야 속 산동네 굽이굽이 돌아가는데
빨래집게에 물린 봄바다 참방참방 돌아오는데


매일 긴요하고 다시 긴요한
프라스틱 大野들



*시집, 젯밥과 화분, 도서출판 신생








糧食 - 김수우



몇 대의 꿈이 지나갔는가, 변두리 정류장, 버스가 오지 않는


새벽비에 나섰다 길 잃은 지렁이, 개미들이 새까맣게 에워쌌다 햇살에 등이 마르는 지렁이를 처음 발견한 개미의 찬란한 전율, 지구가 돈다, 지렁이 몸을 통과한 갠지
스강이 돈다 발목 긴 바람이 돈다


누군가의 치열한 양식이 되는 건 가장 정직한 환생


보도블럭 틈새, 삶을 에워싼 죽음의 오라기를 보며, 죽음을 에워싼 삶의 오라기를 보며


지렁이를 둘러싼 개미떼를 보는 심각한 내가 심각한 너를 기다리는 것쯤, 먹을만한 양식이다


슬픔도 본전이다 운명도 본전이다


비온 뒤, 버스도 사람도 뵈지 않는, 도무지 텅빈, 도무지 서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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