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짧은 윤회 - 채풍묵

마루안 2018. 5. 28. 21:49

 

 

짧은 윤회 - 채풍묵


아내가 백팔 배를 하는 동안
나는 딸아이 손을 잡고
푸른 구름과 흰 구름 사이에 떠있다
딸과 걷는 불국사 바깥마당은
다리와 다리 사이를 오가며
유년과 중년이 함께 하는 짧은 윤회,
노을빛 문 너머 불국토를 보려고
직경 오 리의 바윗돌이 다 닳도록
오며 가며 옷자락을 스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한번은 청운교 젊은 쪽에 서서
또 한번은 백운교 늙음 쪽에 서서
이끼 낀 석축같이 얼굴을 포개고
현재를 과거로 만들고 있다


*시집, 멧돼지, 천년의시작


 




생일날, 봄날 - 채풍묵


삼백오십만 년 전 인류 출현 이래로
어떤 면에서 역사는 생일의 기록이다
일만 년 전 문명의 씨앗종자가
울타리 안에 하얗게 뿌려졌고
보편성이란 종교가 뒷골목을 걸어 들어와
양심의 가로등을 켠 것이 이천오백 년 전이란다
합리적 인식론 간판이 걸린 보육원 문 앞에서
겹겹 둘러싸인 이성이 발견된 것이 일천 년 전
연오랑 세오녀가 동방의 한 귀퉁이에서
해와 달의 정기를 양육하던 순간에도
이미 태어난 것과 새로 태어난 것 사이에
끊임없는 의견들이 봄날만큼 분분히 보채고
그 와중에 이백 년 전 민주정치도 태어났다
몇 십 년 전 나도 세상에 첫소리를 내뱉었다고 한다
소리들이 있었음을 한참 떠올려 보는 생일날
며칠 전부터 나무는 조금씩 숨을 고르더니 
꽃망울을 제각기 터뜨렸다
아, 이 세상 꽃들의 생일은 참으로 많겠구나
봄날, 햇살 아래 앉아 생각 생각하는
하나도 기록할 것 없는
나와 저 무수한 꽃들 중심의
생일 사관




# 채풍묵 시인은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건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월간문학> 시조 등단, 1999년 <문학사상> 시 등단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멧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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