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아 있는 구간 - 박승민

마루안 2018. 5. 28. 21:54

 

 

살아 있는 구간 - 박승민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릴 때 진짜 버리는 거다.
길은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끝날 때 비로소 끝난다.
그 살아 있는 한 구간만을 우리는 뛸 뿐이다.
저의 몸이 연필심처럼 다 닳을 때까지 어떤 흔적을 써보는 것인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부여받고 평생,
눈밭에서 제 냄새를 찾는 산 개처럼 킁킁거리다가
자기 차선과 남의 차선을 넘나들며 가는 것이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기 전까지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라오는 파도처럼
자기를 뒤집기 위해 자기 목을 조우지만,
눈밭에 새긴 수많은 필체 중 성한 문장은 없고
잘못 들어선 차선에서 핏덩어리로 뭉개지고 있는 몸.
쏟아 붓는 백매(白梅)는 얼굴에 닿자마자 피투성이 홍매(紅梅)로 얼어붙는다.
자신의 영정(影幀)을 피하듯 모두들 눈길 옆으로 붙지만
이 신랄한 현장이 현실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릴 때까지
보석(寶石)이 아니라 보속(補贖)의 언덕에 닿기까지
남의 차선과 자기 차선을 혼동하며 가는 것이다.
유족도 없이 혼자 장지까지 가보는 것이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감나무사다리 - 박승민


감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 조롱박의 손
힘줄이 파랗다

쉰을 넘는다는 건
허공으로 난 사다리를 오르는 일

지상의 낯익은 온기들과 멀어져
바람과 구름의 낯선 사원을 지나
자기만의 별자리를 찾아 1인극 하듯 가는 것
진짜 우는 배우처럼 그 역(役)을 사는 것

흔들려도
잡아줄 손이 더 이상 옆에 없다는 사실

아득한 꼭대기에서부터
누군가의 발이 후들거리는지
밤부터 울고 있는지
어깨까지 내려오는
저릿한 통증

조롱박의 왼손이 감나무사다리를 잡고
장천(長天)의 푸른 밤을 혼자 넘고 있다




*시인의 말

또 시가 올까?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
이 生이라는 허공의 그늘에 걸터앉아
조는 듯 귀를 열어놓고
결핍과 자긍 사이에서
다시 막연해지는 일
더 숙연해지는 일
이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
내 외투의 내피는 허무의 허무 속 구름덩어리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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