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공이산 - 권수진

마루안 2018. 5. 25. 23:22



노공이산 - 권수진



운명이라고 했다
나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불행이 너무 컸다
이른 새벽 유언장을 짧게 작성한 뒤
부엉이바위를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천 길 벼랑 끝에 쪼그려 앉아 봉하마을 내려다보며
빛바랜 옛 생각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편백나무 숲길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지만
미처 챙기지 못해 그만두었다
그 동안 건강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며 살다보니
남은 인생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문득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같았다
먼 옛날 노풍이 나를 불러 세웠듯이
한세상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세상의 이치를 뒤늦게 깨달았다
늘 국민들께 죄송한 마음 가눌 수 없어
초야에 묻혀 여생을 조용히 마감하고 싶었지만
지나친 욕심인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누구에게 미안해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허락된다면 시신 따윈 화장시키고
집 근처에 아주 조그만 비석정도 남긴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은 없다고 했다
그해 오월은 유난히 지천으로 개나리꽃이 만발했다
그날 이후 해마다 봄이 오면
꼭 한번 가슴 뭉클한 속병을 앓아야만 했다



*시집, 철학적인 하루, 시산맥사








산상수훈 - 권수진



산을 높이 오를수록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지만
속 좁은 내 마음은 남들처럼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가벼운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쉽게 사랑을 시작했던
우리는 비탈진 길 위에서
자주 미끄러졌다
한 여자도 가슴에 품을 수 없는
못난 남자였다고 치자
쓰러진 너에게 손을 건네지 아니한 건
나였으므로
내 앞에 펼쳐진 능선은 언제나
첩첩산중이었으므로
가벼운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여자의 마음 믿지 못했다
정상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인적이 드문 험준한 길
내가 몇 번을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험난한 가시밭길 함께 걷다
벼랑 앞에서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 조근조근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자기만의 색깔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생소한 시인이지만 독특한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우연히 발견한 시집에서 가슴 저린 시가 있으니 바로 노공이산이다. 내게는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딱 내 마음과 같은 시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시와의 인연이 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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