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잊혀진 계급 - 조숙

마루안 2018. 5. 25. 23:30



잊혀진 계급 - 조숙



노동자 시절 바리케이드 밖으로 몰아냈던
관리자가 되어
남편과 울산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계급이 바뀌어
지금은 모두 잊어버린 지배계급이 되어
현장사람들 볼 낯이 없습니다
생산량이 적다고 못살게 하던 반장님
공손한 웃음을 보이고
구사대 지휘하며 맞서던 총무과 직원들
남편의 손발이 되어 움직입니다


노동자 시절 나는 내가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는
위장취업자였습니다


지금도 말하지 못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젊음을 보냈는지
어떤 일을 가장 사랑했는지


그래서 빨리 늙고 싶어집니다
밥벌이에 거짓을 매달고 살지 않아도 되는
그 정도 거짓쯤은 추억으로 여길 수 있는



*시집, 금니, 연두출판사








그때 끝냈어야 했다 - 조숙



나는 그때 끝냈어야 했다
집중호우 퍼붓던
여름 지리산 칼바위 계곡
널름대며 불어나는 붉은 물 앞에서
두 뺨 발갛게 물들며
죽음의 잠에 들던 친구처럼


뻥 뚫린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스무 세 해 동안을
되감기 한
내 삶의 장면을 다 보고 난 그때


무엇이 되려 했던 나의 욕심과
뛰어다니며
세상의 시간을 다 보낸
것을 후회하던


나는 나무를 쓰러뜨리고
밧줄을 매고
살기 위해 계곡 물을 건넜지만
구멍 뚫린 청바지를 물고 늘어지던
질기디질긴 죽음을 끌고
살아나고 있었지만


젊음의 무릎이 다치고
희망에 대한 살이 빠진 채
목숨을 건졌지만


나는 그때 끝났어야 했다
그 사람 만나기 전이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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