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앵두 - 김명인

마루안 2018. 5. 25. 23:07



앵두 - 김명인



작년의 초록 너무 오래 짙었으므로
지나온 사람의 뜰 아직도 늦봄이다
앵두가 익었다, 불 밝힌 필목 펼치자니
그대가 돌아올 때 한참 멀었는데
때 아닌 꽃다지 들고 장터 포목전 근처를 얼쩡거린다
어디에도 없는 세월
우리가 사는 것 아니듯이
발갛게 익은 앵두는 앵두로서 한철 겪고 간다
그 빛 밝은 그리움 속을 걸어왔으니
유월이 다시 펼쳐놓는 이 길목
앵두여, 어제의 풋풋함을 말 태운
옛 생각은 분홍빛 속에서 더디고 더딘 것
믿을 것이 못 되는 기억 두어 그루
울타리 이쪽에 붙박여 예전의 향기 뿜고 있다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발그레한
네 두 볼을 타고 흐른다
그 스무 살 해마다 사는 나는
가슴 안팎에 웬 앵두 씨나 잔뜩 뱉어놓고!



*시집, 여행자 나무, 문학과지성








投花(투화) - 김명인



키 큰 접시꽃 화염도 제각각이지만
골똘한 생각이나 매달고 빗속에 나앉은 저 얼굴들은
추렴해서 기울인 낮술인 듯 서로가 얼큰하다
꽃들은 아주 낯선 곳에 이른 듯 올해도 어리둥절하고
시절 또한 내남없이 수선스럽지만
피었다 이우는 게 꽃날이니
올해의 꽃불 볼품없다 해도 어둡지 않다
불은 꺼뜨렸으나 불씨 마뜩해서
마당에 그 꽃 폈다는 소식 전하려다
문득 배낭을 메고 현관에 서서야 행선지를 말하던
네가 생각나서 그만둔다
구름 덮치며 햇살 가듯
꽃들은 제 흥망 견디면서 시드는 것
이 봄에 더 많은 결심들이 던져지고 깨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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