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동생이 태어나던 날 - 김선향

마루안 2018. 5. 24. 21:20

 

 

내 동생이 태어나던 날 - 김선향


엄마가 야간근무를 하는 동안
의붓아빠는
내 손바닥을 때리더니
자기 바지를 내렸어요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체리쥬빌레와
의붓아빠의 그것이 사이좋게 놓여 있었죠

차가움과 미지근함
체리 향기와 락스 냄새

내 머리를 누르고 그것을 입에 넣으라고 명령했어요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귀에 속삭이면서

이른바 삼종세트는
의붓아빠의 그것 한 모금
체리쥬빌레 한 스푼
피아노 건반 한 개였죠

피아노 건반을 제법 모은 조용한 일요일
그러니까 못생긴 내 동생이 태어나던 날
아빠와 단둘이 집에 있던 오후
내 피아노는 산산이 부서졌죠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쉿, 이건 비밀이예요
엄마가 알면 목을 맬지도 모른다며
그 새끼가 나한테 당부했거든요


*시집, 여자의 정면, 실천문학사

 

 




도둑 고양이 - 김선향


쥐도 새도 모르게
아기를 지우고

산부인과 지하 식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설렁탕을 퍼먹었다

—피임 같은 건 여자가 알아서 해야지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

흡반처럼 달라붙는 말들을 뜯어내
쓰레기통에 처넣지 못한 채
비디오방에 갔다

거기서 차승원, 설경구랑 놀았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다가
간이소파에 파묻혀
웅크리고 잠을 잤다




# 김선향 시인은 충남 논산 출생으로 충남대 국문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여자의 정면>이 있다. 현재 <사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앵두 - 김명인  (0) 2018.05.25
직선 위에 곡선 - 김익진  (0) 2018.05.25
고독사에 대한 보고서 - 공광규  (0) 2018.05.24
파장 - 김인자  (0) 2018.05.24
친구 하나를 버린다 - 윤제림   (0) 2018.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