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파장 - 김인자

마루안 2018. 5. 24. 20:29



파장(波場) - 김인자



어느덧 해 기울어 파장이다
반듯하고 쓸만한 것들은
초장에 임자를 만나 자리를 떴지만
깎고 또 깎고 덤에 덤을 보태도
끝내 주인을 만나지 못한 것들은
몸을 비비며 보퉁이 안으로 다시 멱살 잡힐 수밖에 없다
장바닥에 남아 먼지를 거부할 수 없는 저것들
파장엔 모두들 어처구니없이 초라하고 남루해
혼자 남은 황혼의 사내처럼 쓸쓸하고 애달프기만 한데
해 떨어지면 다시 어느 장터로 옮겨갈 보퉁이들
밤새 달려가 또 어디에 풀어놓아도
산뜻하게 비워 떨이 될 수 없는 것들
풀기도 전에 다시 쌀 생각으로
마음 조급해지는 장돌뱅이처럼
싸면서도 어딘가 또 풀어야 할 걱정이
기우는 해보다 더 고단한 저녁 어스름
그리움이 깊어 저들 저렇게 견디는 것인지
장터에 쌓인 무덤 같은 보퉁이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외로움 아닌 것들은 어디에도 없다



*김인자 시집, 슬픈 농담, 문학의전당








통속적이고 싶다 - 김인자



치료 끝난 병원 주차자에서 라디오를 켜니 조성모가 그 특유의 미성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춘천 가는 기차' 그러니 내 맘 춘천 안 가고 견디겠나 나는 분명 경춘선을 마음에 두고 시동을 걸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책상에 아픈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아 춘천가고 싶다 기차를 타고 남한강 지나 흐르는 북한강물 바라보며 멀어져가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느리게 지나가는 산과 들에 눈을 맞추며 흔들리는 열차에 몸을 맞기며 화장을 고치며 후레쉬민트를 씹으며 한방에 눈 맞은 사내와 낄낄대며 콧노래를 부르며 발끝으로 박자를 맞추며 삶은 계란을 소금에 찍으며 칠성사이다를 병나발 불며 그걸 순정이라 우기며 본명을 버리고 거짓 전화번호를 주고 받으며 오늘처럼 나른한 오후엔 지루한 생에 태클을 걸듯 기차를 타고 춘천 가고 싶다 가끔은 이렇게 인간답고 싶다 통속적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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