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밤 - 김형미

마루안 2018. 5. 18. 21:48



봄밤 - 김형미



1
공복에 찾아 오는 그리움은
애 밴 처녀 입덧처럼 곤혹스럽다
잇몸 시리도록 찬물 들이키며
입을 틀어막아도 계속되는 헛구역질
신 석류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자궁을 들어내면 그립지 않을까


2
인간이 도무지 숨길 수 없는 것은
사랑과 재채기, 두 가지가 있어
우리는 자주 그 예기치 않은 격정에 휘말리곤 한다
스무 살, 그때까지 젓살 남아 있는 내 가슴속으로
내소사 입구 전나무 길처럼
짱짱하게 뻗어 있던 사내 하나 있어
귓가에 고이 멎는 그의 숨결에도
나는 발 빠르게 뛰놀던 심장 옆으로 비켜서곤 했다
내 배꼽에 고인 물웅덩이 곧잘 받아 마시곤 하던
그 사내 축축한 눈 속에는
꼭꼭 숨어서 훔쳐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늘 가시같이 단단한 그늘 드리운 심연 깊숙한 곳
그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몇천 년이고 잠겨 있다가
꼭 한 사람은 데려갈 것 같은,
그래서 더 추웠을 봄밤이었지만
녹차 물 우리듯 우려내고 싶은 그 무엇이 있었다
어린 무순을 씹었을 때처럼
콧등이 시큰하게 아려오는 그런 사람이
그 옛날 내게 있어



*시집, 오동꽃 피기 전, 문학의전당








자귀화 필 때 - 김형미



살아 있기 때문에
밤마다 통증은 찾아온다


아흐, 몹쓸 사랑이여


그대가 나를 버린 것보다
내가 나를 잃은 슬픔이
이 세계 끝 마지막 집에 저녁내 불을 켜두어
한 생의 낯이 더 캄캄하니 야위어가는 밤
그대의 널찍한 등만큼이나
살다 보면 두 팔로 다 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자귀화 만발한 이 밤도 그러하지만
이 밤의 어둡고 긴 골목길 끝
동그랗게 내버려진 내 사랑 또한 그렇게 외롭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던가
때로 일정한 거리가 그리움을 유지하는 것,
처럼 세월 속에 같은 간격으로 서 있는
이 지독한 외로움 제 목숨을 끊듯
끝내 자귀나무 가지 하나를 끊어놓아
가슴 텅텅 울리도록 나는 속병이 들었지만


내 병은 내가 안다
아흐, 몹쓸 사람이여






# 김형미 시인은 1978년 전북 부안 출생으로 원광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2003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이 있다. 2011년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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