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독거청년 - 서윤후

마루안 2018. 5. 17. 19:35



독거청년 - 서윤후



나는 집에서도 가끔 나를 잃어버립니다


단 하나의 실핏줄로 터진 얼굴들을 생각하며 창백한 창문을 봅니다 실내에서 유일하게 한 일은 웅크림이라는 도형을 발명한 것뿐입니다


테라스엔 바깥을 서성이다 온 사람들이 있고, 그곳엔 버스나 기차가 정차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씩 밀려나는 연습을 합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감히


나는 나를 슬퍼할 자신이 있습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포개거나, 일 인 분의 점심을 차리는 일에 능숙합니다 홀수와 짝수가 나란해집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모험이 끝났습니다 못에 박힌 벽처럼 단단해집니다 헐렁한 손목에서 시계가 자꾸 죽습니다 쓸모 없는 시계추가 눈덩이로 내려앉습니다


안으로 침투할수록, 이불은 넓어집니다 안에도 바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열대어들이 서로 친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끝나지 않는 어항을 바라보다가


나는 약속 시간에 늦습니다 나를 꾸짖지 않는 나를 만날 때마다 무거워집니다 배치될 가구의 기분으로, 서랍마다 나를 구겨 넣습니다


꺼내 보고 싶지 않은 나를 찾는 날엔, 운 좋게 천장을 걸을 수 있습니다 걸터앉은 곳마다 부러지면 실내가 실내를 이해할 때까지, 온도계는 모호해질 수 있습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민음사








화염 - 서윤후



우리는 뱉은 말을 줍기 위해 소문이 필요했다


버려진 헛간을 은신처로 삼았다 우리만 아는 이곳에 누군가 횃불을 피워 놓았다


저 횃불을 끄고 싶다
사라지는 연습은 모두 끝났다


먼 나라의 학살처럼 멀어지는 슬픔
우리는 따뜻해져 졸릴 수밖에 없는 공포


알레르기처럼 징그럽게 모여 덩어리가 되어 갔다


웅크린 그림자를 그을리던 횃불이 사나워지자 서서히 눈이 감겼다
우리의 은신처를 들키면 이제 사라져 버릴 공간, 불이 난 헛간에서 발견되지 못한 목숨을


장난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못 본 척 사라져버리는 숨바꼭질이, 셋 셀 동안 더 곤란해졌다 병이 사라질 때까지 거짓말이 무너질 때까지


양초처럼 우리는 참 하얗게 생겼었는데
재와 먼지들도 어둠으로 지는 시간


아주 태연하게 사라질 것이다
화염과 우리의 섬광
그 사이의 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