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이름의 꽃말 - 류근

마루안 2018. 5. 18. 22:06



내 이름의 꽃말 - 류근



내 아직도 기억한다 봄과 가을에 정든 꽃말들
숲으로 가면 오래 썩은 풀뿌리 하나 그윽이 일어서고
더듬이 잘린 하늘소 따라 또 하루 길 잃고 서성일 적에
비 오는 날들과 파릇한 돌멩이들 사이에서
죽은 누이의 손가락 한끝이 가르키던 몽롱한 하늘
살아남을수록 나는 상처의 베옷 속으로 몸을 굽히고 시간은
허락도 없이 내 삶의 모든 자세를 가르쳤다 그러나 돌아보면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입자들로 쌓여져 있을 뿐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아주 베어 넘길 수 없는 나무 한 그루
가슴에 힘주어 심어두고 사는 까닭을 내 환히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가끔은 알 것도 같다 기억 안의 그 무엇이
일용할 양식과 거룩한 한 나라로 마침내
두려움도 없이 이마 위에 꽃피게 되는가를 오오,
한 줌의 따뜻한 씨앗이거나 한 다발의
튼튼한 별자리로 오래도록 흐르게 되는가를


즐거워라 마음 따라 바람의 이웃으로 불리어 가며
생채기 푸른 계곡 깊이깊이 흘러가면 거기 모과나무
언덕 위에 알몸으로 달려 나와 놀아주던
구름과 당나귀와 마음씨 곱던 송사리들
이제는 엿으로도 바뀌지 않는 논강리 고추밭
고량마다 폐비닐 조각들이 아침 거른 운동회 날
즐거운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펄럭인다 선생님은 언제나 치마만 입는데도
종어리에 때가 끼지 않고 다만 육성회비 누런 봉투에
몇 달째 도장이 찍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왜
갑자기 흰곰팡이 핀 장아찌처럼 시들어진 어머니가
보고 싶어지신 것일까 나는 언제나 일등만 하는데도
모르는 게 이렇게도 많을까 도대체 몇 밤을 더 자고 나야
아버지 오는 길 볼 수 있을까 나는 달리기가
싫었다 나도 너처럼 고기 수프만 매일 먹을 수 있다면
너 따윈 충분히 꺾을 수 있어. 그 이후로도
슈바이처 박사는 평생 고기 수프를 먹지 않았습니다. 젠장
시래기죽이라도 매일 먹을 수만 있다면 비석골 지나
도라지꽃이라도 꺾으러 갈 수 있을 텐데 진실로
진실로 또다시 꼴찌로 달리기란 굶기보다 싫었지만 눈 감으면
쓰르라미 우는 소리가 일요일마다 착하고 어린 양으로 돌아가
참회 기도 한 번으로 남은 밀떡 모아 주던
목사관 괘종 소리보다 쟁쟁하게 잠 끝까지 밀려욌다
즐거워라 산 하나를 불 지르고 늦봄에 개철쭉보다 붉었던 누이와
꽃 꺾어 만들어준 누렁이 무덤 위에 누우면
반짝이는 가방을 들고 마을로 찾아드는
다 저문 사내 하나 네 이름이 뭐지?
뭐지? 내 헛간 같은 기억의 사진첩 안에 처음 꽂히는
오, 최초의 아버지


그리고 또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허물고 나를 허물었던 숱한 벽들과
되돌아볼 때마다 소금 기둥으로 굳어버리던 발자국들 한 번도
이 지상에 꽃핀 적 없던 예언의 말씀들 위에
자주 쓰러져 발 묶여 울 때마다 꽃다지처럼
피어오르던 순은의 종소리들
무엇과도 바뀌지 않는 날들의 책갈피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흘러가는 내 이름의
그 오랜 꽃말들을



*시집,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당신의 처음인 마지막 냄새의 자세 - 류근



당신은 참 많은 냄새를 내게 주었다 어떤 비 오는 날은 당신 냄새 너무나 자명해서 나는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아니면 빗소리였나 작은 옛날의 아이들이 갈색 구두를 신고 사라지는 소리 같은 것


엎드려 울거나 웃을 때, 당신은 왜 그 자세를 좋아했는지 가령 앵무새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자세 따위가 어떤 불안에 위로가 되어줬는지 모르지만 그때 받은 냄새는 꽤 오래도록 기억이 남는다 어떤 자세든 냄새로 기억된다는 것은 오랜 뿌리를 심었다는 뜻이다


몸을 벌리고 큰 나무 구멍처럼 내다볼 때 마침 간신히 성숙한 밤꽃 냄새 같은 것도 물론 기억난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준 냄새보다 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친절한 미래라거나 무례한 인생 같은 말들을 굳이 떠올리지는 않았다


냄새가 키우는 꽃을 따라가면 곧 신비하고 슬픈 내부에 다다르게 된다 당신과 나, 아주 저물기 전에 기왓장이든 무지개든 붙들고 결국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을까 물 앞에서 흐린 침대 위에서 당신은 힘껏 알약처럼 부서져 거듭 처음인 냄새에 휩싸여 있곤 했다 그건 말하자면 지구의 이 끝과 저 끝으로 이어진 우물처럼 깊은 것이었다


당신의 처음인 냄새를 나는 늘 마지막으로 간직할 뿐이어서 처음과 마지막이 한몸으로 비틀리는 자세의 닿을 수 없는 냄새를 영원히 당신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 다녀간 그 숱한 것들 가운데 당신밖에 나를 이 끝까지 데려다 놓은 처음은 없다






#두 시 모두 다소 길다. 이 긴 시를 언제 다 옮겨? 잠시 망설이다 지금 안 하면 나중 후회할 것 같아서 한 문장씩 소리 내어 읽으면서 옮긴다. 시 읽는 재미는 이럴 때 훨씬 배가된다. 입으로 낭송하며 손으로 쓰는 싯구가 명징하게 가슴에 스며든다.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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