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대한 밥 - 정원도

마루안 2018. 5. 19. 22:37



거대한 밥 - 정원도



파쇄기가 돌아간다
숱한 목숨들 까마득히 거대한 입 속으로
무엇이든 받아먹는 대로 뱉어내는 괴력에
식사시간도 없이 돌아간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돌려주는 누군가와
잠도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함께 가야 한다는 것


기계도 사람도 도저히 고장 나면 안 된다는 것
집채만 한 바퀴가 쉴 새 없이 굴러도
절대 주저앉으면 안 되는 욕망은
세계가 추구하는 밥이다


한 쪽에서는 남아도는 밥을 어쩌지 못하고
또 한쪽에서는 궁핍한 밥을 얻기 위하여
찌든 몸을 던져야하는
먹어치워야 하는 밥이 많아질수록
밤 지새워 끝없이 굴러가야 하는
저 거대한 밥이 무섭다


끝도 없는 속도를 강요하는
잠도 없는 밥이 두렵다



*시집, 마부, 실천문학사








순자 - 정원도



학교 마친 오후에는
뒤꼍 감나무 그늘 아래
쇠비름 강아지풀 채송화꽃잎처럼
소꿉 밥상 차려 놓고


순자는 어김없이 엄마가 되어
방도 치우고 마당도 쓸고
머리 수건까지 챙겨 쓰고
궂은 일 도맡아 하던 동무였다


지금은 어디서 어떤 엄마가 되었을까
아이 하나 들쳐 업고
우유 배달을 할까
초등학교 마치자마자 들어간
공장에 다시 들어가
장갑 짜는 일을 한다고도 하고


튼실한 신랑 하나 만났을까?
소꿉놀이하던 뒤란 감나무는 베어지고 없는데
꾸불꾸불 옛 골목길만 남아
짧았던 오두막 추억을
곰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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