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믿음직스런 광대 - 전대호

마루안 2018. 5. 17. 20:00

 

 

믿음직스런 광대 - 전대호

 

 

태양처럼 당당했던 시절에 비해

더 오랜 시간이 걸려 말문을 열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여전한 것 같다

책가방을 처음 챙기는 아이처럼

제 삶의 계획을 얘기한다

 

세상을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바꾸면 좋겠다고 말한다

바꾸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즐기던 얘긴가!

그가 여전히 그런 얘기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이

내게도 즐거움을 준다

 

작은 시냇물처럼 시작된 그의 얘기가

산악 지대와 평지를 지나

아주 큰 물줄기가 될 때까지

어디로 가든 어디로 가든

여하튼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을

나는 안다 그게 그의 본성이다

 

내가 그렇듯 그 역시

가로등의 눈으로 우리의 모습을

내려다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도 이미 서둘러 충분한 나이를 퍼먹었으니까.

그를 바라보며 편안히 턱을 고인 내게

아, 그는 정말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 민음사

 

 

 

 

 

 

네로와 나 - 전대호


파트라슈와 함께 하늘과 맞닿은 길을 누비던
소년 네로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싶어했다
푸른 언덕 위에 홀로 선 늙은 향나무 그늘에서
귀여운 그의 연인 알로아를 모델로 앞에 놓고도
소년은 말하는 것이었다: 꼭 한 번만이라도.
나는 너무 무거워 보였던 소년의 나무 신발을 기억한다

결국 소년은 루벤스를 보았다
정말 꼭 한 번, 기적이 그를 도왔다
열망은 생애에 꼭 한 번쯤 바람처럼 임하는 기적을 낳는가?
그럴 것도 같애 하지만 기적이란 게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더군.
소년은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따스한 개털에 파묻혀 미소 지으면서.

나는 막 울었다
그 후로 이제까지도 그만큼 나를 흔든 사건은 없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사랑이나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바램 따위,
개뿔도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마치 내 이름이 외워지듯
가장 밑바닥에 새겨져 버렸다
나는 울었다 그때 나는 아직 꼬마였으므로
내 맑았던 두 눈에서 왜 눈물이 나와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 전대호 시인은 1969년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성찰>, <가끔 중세를 꿈꾼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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