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직스런 광대 - 전대호
태양처럼 당당했던 시절에 비해
더 오랜 시간이 걸려 말문을 열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여전한 것 같다
책가방을 처음 챙기는 아이처럼
제 삶의 계획을 얘기한다
세상을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바꾸면 좋겠다고 말한다
바꾸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즐기던 얘긴가!
그가 여전히 그런 얘기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이
내게도 즐거움을 준다
작은 시냇물처럼 시작된 그의 얘기가
산악 지대와 평지를 지나
아주 큰 물줄기가 될 때까지
어디로 가든 어디로 가든
여하튼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을
나는 안다 그게 그의 본성이다
내가 그렇듯 그 역시
가로등의 눈으로 우리의 모습을
내려다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도 이미 서둘러 충분한 나이를 퍼먹었으니까.
그를 바라보며 편안히 턱을 고인 내게
아, 그는 정말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 민음사
네로와 나 - 전대호
파트라슈와 함께 하늘과 맞닿은 길을 누비던
소년 네로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싶어했다
푸른 언덕 위에 홀로 선 늙은 향나무 그늘에서
귀여운 그의 연인 알로아를 모델로 앞에 놓고도
소년은 말하는 것이었다: 꼭 한 번만이라도.
나는 너무 무거워 보였던 소년의 나무 신발을 기억한다
결국 소년은 루벤스를 보았다
정말 꼭 한 번, 기적이 그를 도왔다
열망은 생애에 꼭 한 번쯤 바람처럼 임하는 기적을 낳는가?
그럴 것도 같애 하지만 기적이란 게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더군.
소년은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따스한 개털에 파묻혀 미소 지으면서.
나는 막 울었다
그 후로 이제까지도 그만큼 나를 흔든 사건은 없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사랑이나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바램 따위,
개뿔도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마치 내 이름이 외워지듯
가장 밑바닥에 새겨져 버렸다
나는 울었다 그때 나는 아직 꼬마였으므로
내 맑았던 두 눈에서 왜 눈물이 나와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 전대호 시인은 1969년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성찰>, <가끔 중세를 꿈꾼다>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밤 - 김형미 (0) | 2018.05.18 |
---|---|
실업의 계절 - 황명걸 (0) | 2018.05.17 |
독거청년 - 서윤후 (0) | 2018.05.17 |
어느 유목민의 시계 - 나호열 (0) | 2018.05.17 |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 안성덕 (0) | 2018.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