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실업의 계절 - 황명걸

마루안 2018. 5. 17. 20:18



실업의 계절 - 황명걸



--고장난 시계나 라디오, 증권 삽니다
늙은 행상의 맥빠진 외침소리가 잦아드는 골목 안에서
지난여름 우리는 얼마나 답답해 죽으려 했던가
사지가 멀쩡하고 능력도 있으면서
일자리가 없어 방바닥을 뒹굴고
예비군복이나 걸치고 동네를 헤매던
그 무위의 하고한 나날들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지옥이었던가


남들은 일을 해 흘린 땀을 시원히 목물로 씻어버리고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내일을 준비하는데
쏟아지는 수도 물발에 남근 대가리를 맞으며
야릇한 쾌감에나 젖던
그 변태의 여름, 실업의 계절이여


이 여름 나는 요행히 자리를 얻어 일할 수 있어
휴일 낮 불타는 뜨락에 물을 뿌리고
식물 같은 식솔들과 함께 마루에 앉아
밭에서 갓 뜯은 상치를 싸느라 손을 적시지만
생각하면 남의 일이 남의 일 같지만 않다


--고장난 시계나 라디오, 증권 삽니다
늙은 행상의 맥빠진 외침소리가 잦아드는 골목 안에서
이 여름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 답답해 죽으려 할 것인가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 창비








변기 속의 쿠데타 - 황명걸



하얀 사기변기에 떨어진 한가닥 치모
그것이 나를 긴장케 한다


처음 그것은 시체였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
이미 그것은 단순한 터럭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마리의 꿈틀거리는 생물
악취와 미끄러움에서 몸부림치는
반항아였다


독한 소변에
씻겨도 씻겨도 쓸려 내려가지 않고
호히려 고개 들며 대드는
그 집요한 저항
변기 속에 가득 적의가 찬다
적요가 감돈다
쿠데타설
나는 열에 떠 온몸을 떨고


하얀 사기변기에 떨어진 한가닥 치모
그것이 나를 전율케 한다






# 황명걸 시인은 1935년 평양 출생으로 해방후 월남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다 중퇴했다. 196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국의 아이>, <내 마음의 솔밭>, <흰 저고리 검정 치마>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이름의 꽃말 - 류근   (0) 2018.05.18
봄밤 - 김형미  (0) 2018.05.18
믿음직스런 광대 - 전대호  (0) 2018.05.17
독거청년 - 서윤후  (0) 2018.05.17
어느 유목민의 시계 - 나호열  (0) 2018.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