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유목민의 시계 - 나호열

마루안 2018. 5. 17. 19:22



어느 유목민의 시계 - 나호열



하늘이 어둠의 이불을 걷어 내면 아침이고
멍에가 없는 소와 야크가 마른기침을 토해 내면
겨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식솔만큼의 밥그릇과 천막 한 채를 거둬들이면
그때가 저녁이다


인생을 모르는 사람들은 유목민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멀리 떠나 본 적이 없다
소와 야크의 양식인 풀이 있는 곳
그곳이 그들의 집이고 무덤일 뿐


그들에게 그리움이란 단어는 없다
언제 다시 만날까 그들에게 묻지 마라
앞서 떠난 가족들 설산 위에 별로 빛날 때까지
바람의 숨소리를 듣고
해의 기울기에 온몸을 맡기는
그들에게 시계는
물음표를 닮은 커다란 귀와
하늘에 가닿은 눈이다



*나호열 시집, 촉도, 시학사








지나가네 - 나호열



서녘하늘에 걸린 노을을 읽는다


붉어졌으나 뜨거워지지 않는 마음 한 자락을
닿을 수 없는 손길로 걸어 놓아도
그 깃발을 신기루로 이미 알아 버린 탓일까
아직 노을이 꺼지기에는 몇 번의 들숨이 남아 있어
긴 밤을 건너갈 불씨로
빙하기로 접어든 혈맥을 덥힐 뜨거운 피로
은은하게 가슴 속 오솔길에 퍼져 오르는 와인 한 잔으로
오독하는 동안
늙어 더 이상 늙지 않는 심장은
빠른 보폭으로 세월을 앞서 가지만


그래도 아직 가야할 서녘을 바라보는 눈 속에는
겨울에 피는 꽃
향낭 가득 씨로 남아 있는
배우지 못한 말이 남아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직스런 광대 - 전대호  (0) 2018.05.17
독거청년 - 서윤후  (0) 2018.05.17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 안성덕  (0) 2018.05.16
유적지 혹은 유형지 - 유병록  (0) 2018.05.16
꽃 지거든 - 이창숙  (0) 2018.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