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창문 아래 잠들다 - 이응준

마루안 2018. 4. 20. 21:36



창문 아래 잠들다 - 이응준



무엇을 바라보다 잠들었던 것일까.
저기 두 사람이라는 말과 저기 숲이라는 말 중에
그가 더 슬퍼했던 풍경은 어느 쪽이었을까.
마음을 정리했다는 말보다 두렵고
마음을 잃었다는 말보다 막연한 날들이 그에게 오리라.
그가 사랑해선 안 되는 이들에게 곧 오리라.
하지만 잊었다고 노래하며 영원히 기억하는 동안
저울과 시계 곁을 서성이던 청춘은
묻힐 만한 한 뼘의 어둠이 없어
기억되지 않아 잊히지도 못하는 소실점이 되었다.
그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상처만큼은 아름다워야 겨우 추억이라고 수줍어할 수 있는 것처럼
난국이 사무쳐 꽃이 되어 버린 청춘을 그는 그리워하기나 했던 것일까.
다만 꽃들의 술책과 기만을 견디며
결코 정리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자라나
결국 천천히 잃어 가듯 늙어 가는 그가
언젠가 절벽 끝에 서서 바다라는 거대한 수사학을 한껏 조롱했던 그가
이제 불꽃과 함께 잠든 모든 청춘들에게 전한다.
저기 두 사람이라는 말도
저기 숲이라는 말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
눈물이 남아 있다면 눈물 앞에서 선회하라.
아는가. 알 수 있겠는가.
거대한 바다가 거대한 바다가 있는 창문이 되었다.
치욕이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신 같은 것.
무엇을 기다리다 잠들었던 것일까.



*이응준 시집, 애인, 민음사








봄 - 이응준



광으로 기어 들어가
그곳이 제 뜰이라 생각하며
죽고 싶은 한 사내가


서글픈 좌우명
'인생일장춘몽'을 들고


고통 없는 여대생들
앞에 섰다.


하나님도 살아 있으려면
인간의 죄가 필요한 것처럼


모든 고백에는
정액 냄새가 난다.


참회가 그리울 때
나는 가끔씩
이렇게 놀라지.


창가에 앉아
피를 파는 햇살은
봄이 어지러워


여섯 개의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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