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당의 오래된 펌프 - 심재휘

마루안 2018. 4. 21. 23:05



마당의 오래된 펌프 - 심재휘



명아주 피어 있던 그 마당의
오래된 펌프는 한 바가지의 몰만 부어주면
맑은 물을 한없이 퍼올리고는 하였다
나는 펌프의 뿌리를 따라 내려가
달이 뜨는 어느 마을에 닿기도 하였다
꽃들이 빈방을 열어주던 시절


수소문을 하여보았지만
그 오래된 펌프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대개 꽃들은 일찍 시들고
거리에는 사랑이 활짝 피어났다 대신
밤마다 수도관을 타고 올라오는
수상한 울음소리를 잠결에도 모두들
똑똑히 들어야 했다



*심재휘 시집, 그늘, 랜덤하우스








라디오를 닮는다 - 심재휘



맑은 날이면 창밖의 과실나무는
바람에 몸을 내걸 줄 안다
더는 열매를 길러 낼 수 없어도
제 상처를 핥으며
오래 아파할 줄 아는 나무


그러나 나는
저 병든 나무로부터
매일 조금씩 옮겨와
라디오의 어느 거친 주파수에 서 있다
녹슨 왕관을 뒤집어쓴 채
서서히 방전되는 라디오


몸이 아프다는 것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잃어버린 몇 개의 나사와
부러진 안테나를 생각한다는 것
더불어 나의 기억은 늘 수리 중이므로
어느 날 당신을 몰라볼지 모르겠다


당신께 미리 용서를 구한다





# 어릴 적 동네에는 두 개의 공동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몇몇 집에는 마당가에 펌프가 있었다. 매미 소리 요란한 여름날 공동 우물까지 물 뜨러 가기 싫을 때면 가까운 한 집에 들어가 펌프물을 받아왔다. 우리는 이것을 뽐뿌물이라 불렀다. 펌프가 있는 장독대 옆에는 봉숭아가 피었고 어느 날 장독대 옆 담벼락에서 구렁이가 기어나와 기겁을 하고 도망을 왔던 추억이 있다. 지금은 유물이 되어버린 풍경들이다. 내 몸이 수리 불가능에 이를 때쯤에 이 추억은 잊혀질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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