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이 지거나 지지 않거나 - 이승희

마루안 2018. 4. 17. 20:17



꽃이 지거나 지지 않거나 - 이승희



꽃이 지는 천변을 걸으며
어찌도 이리 다정하게
내 몸에 잠겨드는지
나는 애초 그것이 내 것인 줄 알았네
지는 것들을 보며
끈적이는 핏물이 꼬득꼬득 말라 비틀어지도록
이처럼 황홀했던 저녁
내겐 없었다고 말해 주었네


불 켜진 집들 사이에서
불 꺼진 집이 오랜 궁리에 빠져드는 동안
나는 그만
따라가고 싶었지
지는 것들의 뒤꿈치에 저리 아름다운 한가로움


내 것이 아닌 것들로 행복해지는 저녁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가로등 불빛이 말해주지 않아도
내게 구역질하지 않는 것들만으로도 얼마나 선한가
선한 것들에게는 뭐든 주고 싶어
이제 나는 무엇을 더 내놓을 것인가 생각하는데


꽃이 지거나 지지 않거나
너는 가고
나는 남는구나


나는 남지 말아야 했다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오, 행복하여라 - 이승희



외로움은 나의 밥, 찬 없이도 먹을 나의 끼니, 내 소망은 세끼 밥과 야식까지 골고루 야무지게 잘 챙겨 먹는 것, 외로움으로 살찌는 일, 그리하여 외로움 하나만으로 나 풍성해지는 거짓말 같은 생, 나 이제 외로움의 식구를 얻었으니 함께 먹고 또 먹어 배 터져 죽고 싶다. 버석거리던 날들이 외로움의 독을 입어 이리도 촉촉하니 축복받음 아닌가. 날마다 독이 퍼져 이 저녁의 숨소리 그윽하구나, 외로움이 서 있는 그 자리. 거긴 원래 미루나무가 오래 서 있던 자리, 딸아이 날마다 학교 가던 길, 지치고 아플 때 하염 없이 집을 바라보던 길. 오늘도 집 나간 마음은 기별 없으니 기다림으로 접혀진 마음자리는 쉽게 찢어지고, 마음 없어도 몸은 자주 아프고, 마음 없이 병든 몸은 가난한 세간 옆에서 쓰러져 잠들고, 그리운 것도 없이 살 수 있다니, 오 놀라워라 거짓말 같은 나의 생이여.





# 올 봄은 하도 변덕이 심해 꽃 피는 것도 제대로 볼 새가 없었다. 일주일이나 일찍 핀 꽃이 갑작스런 추위에 바짝 긴장하더니 비와 바람에 속절없이 졌다. 꽃 지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했어도 외로움은 여전하다. 이승희 시는 읽을수록 쓸쓸하다. 문장 속에 담긴 외로움이 꽃 지는 지금과 딱 어울린다. 아쉬운 이 봄날은 언제 다 가려나.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귀비 수난 시대 - 홍순영  (0) 2018.04.18
꽃의 흐느낌 - 김충규  (0) 2018.04.18
영화가 끝난 후 - 박이화  (0) 2018.04.17
봄, 그날에 - 서상만  (0) 2018.04.17
바퀴 소문 - 천수호  (0) 2018.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