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영화가 끝난 후 - 박이화

마루안 2018. 4. 17. 19:54



영화가 끝난 후 - 박이화



일 년을 기다려
고작 사나흘도 채 안 되는 생을 만개하고
한순간 사라지는 벚꽃의 뒷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다


빛바랜 추억이 있다면
환등기처럼 환하고 눈부신 봄날의
저 분분한 낙화와 같을 게다


벚꽃처럼 피었다
벚꽃처럼 흩날리는 한때처럼
사랑 역시 탄성으로 피었다
탄식으로 시드는 한때일 테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 일이다
영화가 끝난 후
가슴 오래 먹먹했던 여운처럼
감동은 뜻밖에
뒤에 남아 있는 것이어서
저 벚꽃 다 지고 나야
비로소 완연한 봄인 것이다


스크린 속 어룽어룽 사라지는 자막처럼
허공 속 저 벚꽃 다 지고 나야 비로소.....



*시집, 흐드러지다, 천년의시작








스크린에 비는 내리고 - 박이화
 


한때 오고 가는 버스 속에서 스치던
변두리 삼류극장 간판은 은밀한 나만의 갤러리였고
금지된 도색잡지였다


나는 때로 판도라 상자를 열듯
두근대는 심정으로 극장 문을 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의 대한 늬우스 속에선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곤 했다


그러나 사철 비 내리는 스크린 탓이었을까?
영화 속 세상은
술집과 여관이 판을 치고
그 속의 생들은 수시로 벗고 수시로 취하고
수시로 죽어 가고 있었다


가시를 삼킨 장미가 있었고
산딸기는 저 혼자 익어 갔고
어쩌자고 앵무새는 온몸으로 울기만 했는데


그 눅눅한 곰팡내 나던 극장 안에서는
사람마저도 쩔고 쩔어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눌러붙어 있곤 했다
어둠 속 코를 찌르는 지린내처럼
아무렇게 들러붙은 단물 빠진 청춘들처럼


스크린에 비 내리듯
거리에 저녁 비 치룩치룩 내리던 그 어느 평일의





# 마치 영화를 보다 도중에 필름이 끊긴 것처럼 느껴진다. 끝부분을 찍다 갑작스레 감독이 죽어 미완성 영화를 본 것처럼 아련한 여운이 남는 시다. 이렇게 독자를 애타게 만드는 것도 시인의 묘한 재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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