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양귀비 수난 시대 - 홍순영

마루안 2018. 4. 18. 19:47



양귀비 수난 시대 - 홍순영



-아따, 꽃 좀 보려고 몇 포기 심었는디 그것도 죄가 된당가
고 하늘하늘한 낯짝이 울 마누라 처녀 적 속살 같아 좀 두고 볼라갔더니 말쎄


제대로 꽃 한 번 못 보고 꺾인 마음에 먹장 낀다
천지사방 꽃 축제 지천인데
텃밭 양귀비는 쨍한 삽날에 짓이겨져
줄기고, 이파리고, 우르르 한구덩이에 묻히는데
덩달아 노인네의 주름진 추억도 흙투성이가 되고


보송보송 털 달린 꽃 양귀비는
축제마당에 불려 나가 절창을 뽑아내고
텃밭에 몰래 심어 혼자 보려던 양귀비는
속이 타들어 제 낯빛 놓치고야 말아


죄목은 아픔을 잊게 하고
꿈꾸게 한 죄
갖고 싶은 것 안겨주는 꽃의 힘이 모두 독이라는
독은 독을 견디지 못하니
맨몸으로 살라는
향기도 벗고
꿈에 절은 마음도 벗고
때 되면 시드는 몸만 품고 살라는
지독한 형벌의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문학의전당








목련 발자국 - 홍순영



꽃들도 발자국을 남긴다는 걸 알았네
어제 내린 밤비에 물컹거리는 진흙바닥 디디며
막 계절을 건너가는 목련의 발자국
서두른 흔적 보이네
꽃잎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진 모습
상갓집 신발들 보는 것 같네
급히 우리들을 떠나간 당신도 빗물을 밟고 갔네
나의 일별을 쓸쓸해하며 돌아서는 당신의 발자국
내 발을 밟고 가네
몇 번이고 밟혀 짓이겨진 발등은
언제 이 봄을 다 건너려나
서둘다 보면 넘어지는 봄이네
넘어지면 일어서기 힘든 봄이네
당신처럼, 놓치고야 마는 봄이네
발자국은 점점 선명해지다 홀연히 사라지네
내 기억 속의 당신도 어느 날 문득,
저 꽃잎처럼 사라지고 말겠네





# 다소 이질적인 두 꽃의 운명이 꼭 세상사를 말하는 것 같아 오래 눈길이 간다. 어쩌다 이 사람은 시인이 되었을까. 운명을 거부한 죄로 시름시름 앓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시인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말을 옮긴다.



누가 나를 이 낡고 허름한 집에 부려놓았을까
혼자 견뎌야 하는 낮과 밤이 아득하기만 하다
이런 곳에도 새가 날아와 줄까
가끔씩 안부를 묻고 갈 당신을 기다려본다.   -시인의 말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다른 일 - 김병호  (0) 2018.04.18
이단자 봄꽃에게 - 이재섭  (0) 2018.04.18
꽃의 흐느낌 - 김충규  (0) 2018.04.18
꽃이 지거나 지지 않거나 - 이승희  (0) 2018.04.17
영화가 끝난 후 - 박이화  (0) 2018.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