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밥 가까이 - 김명인

마루안 2018. 4. 16. 22:28



꽃밥 가까이 - 김명인



세상 모든 밥벌레들은
한 끼니 제 밥상 가까이 다가앉기 위해
얼마만큼 수고 속으로 내몰리는가
제 힘으로 밥상 한번 차려보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이 꽃 저 꽃 기웃대는 벌들도
예 아니다 싶으면 한참 동안 허공 맴도는데
서른세번째 회사에 이력서 바치고 축 처져
고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
나도 일 막(幕) 내리기 전
서둘러 밥그릇 생(生)에 나를 알선시켜야 한다
생계라고 사로잡는 게 눈먼 일당이라면
허방에 거미줄 쳐놓고 빈 손금이나 더듬는
이 애벌의 시간도 간절하게 절절하게
씨앗을 품고 파종의 때 기다리는 중,
모래는 눈물 따윈 간직하지 않으니
낮잠 늘어지게 재워둔
깔깔한 혓바닥이나 깨워 하늘 사막까지
핥으며 가볼까, 온몸에 가시 세운
선인장 깔고 앉아 거기서라도 터 잡아야지
나비의 일터가 꽃이라면
쑥밭이라도 좋으니 내게도 꽃 이울 터전을 다오
일생일대의 호접무(胡蝶舞) 펼쳐보일
무대에서 자꾸만 밀쳐내는 건
이 환한 봄날이 뉘게나 꽃 시절 아니므로!



*김명인 시집, 꽃차례, 문학과지성








오후 여섯 시 반의 학습 - 김명인



길 떠나는 친구를 여럿이서
배웅하고 돌아서는 저녁, 어느새
오후 여섯 시 반의 해거름 앞에 서지만
이 짧은 학습은 언제나 지지부진하다, 아뜩한
봄날이 올해는 좀더 일찍 당도했음을 깨우칠 뿐,
남은 일과를 헤아려 어제처럼 돌아가려고 해도
일몰의 관습 도무지 낯설구나, 나는
애면글면 조급하므로 다들 그런 태도에 대해
한마디씩 한다: "당신은
너무 서두르거나 언제나 성급하군요"
그렇더라도 더 빨리 지지 않는 해를 기다려
오늘처럼 지친 적 없었으니
그예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일까
문득 집 근처에서 전화를 받는다, 시커먼 갈비뼈 아래
숨겨놓았던 사십 년 전의
여자, 사 년 전, 사십 일 전
오, 사백 년 전의 여자가 미라로 발굴되었다!
그토록 긴 세월 썩지 않고 기다려온 참을성으로
사백 년 뒤를 쳐다보는 저 퀭한 눈!
주검의 먼지 풀썩거리면서
당신은 아직도 서두르거나 언제나 성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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