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때 아주 잠시 - 류경무

마루안 2018. 4. 16. 21:57



그때 아주 잠시 - 류경무



화장실에 갇혔던 술 취한 레지스탕스는 모든 걸 포기했다
점점 뚱뚱해져서 이제 저항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곧 고백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게 죄였으니까


그렇다면 하나만 묻자 이후의 생은
모두 참혹해야만 하는가?
하찮고 우연한 것들이 불결한 모습을 가졌듯
요새는 살아남은 깡통 부스러기들이 딸랑거리며,
전범자의 얼굴을 하고 수시로 되묻는다


여기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도대체 어떻게 나갈 수 있느냐고
그러면 당신은 씨익 웃으며
침묵의 거대한 미소를 던지겠지
그렇다고 하늘을 올려다볼 것까지는 없는 일
그건 순전히 이곳의 문제였으므로


그때 나는 아주 잠시
늙은 몸을 한 어떤 짐승이
멀리서 이쪽을 향해 홀로 반짝이는 것을 본다


밤의 등대가 캄캄한 바다에 자기의 얼굴을 묻듯
이제는 정말 내게 마지막인 당신,
처음 왔을 때처럼 웃으며



*시집, 양이나 말처럼,문학동네


 






유언 - 류경무



가족이 없는 그에게 가족을 부탁한다고 편지를 썼다
들어줄 수 없다고, 가족이라곤 나밖에 없다고
그가 답장했다


김씨네 재실로 자신을 데려다줄 수 있느냐고
버스를 탄 늙은이가 운전수에게 물었다
자기도 김씨 성을 가졌지만 김씨 재실엔 절대 가지 않는다고,
원래 가지 않은 길은 가지 않는다고 운전수가 말했다


길가 봄꽃들이 아무리 만발해도
보지 않으려 애쓰면 보이지 않는다네,
늙은이가 귓속말로 나에게 속삭였다 점점 짧아지는 여자 애들의 치맛단이
정말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건강염려증이 더 심해지는 사월이었다


가족이 없는 그에게 가족을 부탁한다고
다시 편지를 보냈다
떠넘기지 말라고
나에게도 가족은 당신뿐이라고
그가 답장했다


어제는 하얀 개가 검을 개를 낳았다
어미에게 다리를 물린 검은 개는
결국 오늘 죽었다
내일이 아버지 기일이라고
억지 좀 부리지 말라고
그가 나를 타일렀다





# 류경무 시인은 1966년 부산 동래 출생으로 1999년 <시와반시>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양이나 말처럼>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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