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덧 아내와도 헤어지는 연습을 - 홍신선

마루안 2018. 4. 3. 22:42

 

 

어느덧 아내와도 헤어지는 연습을 - 홍신선


어느덧 아내와도 헤어지는 연습을 한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음에서 등을 떼면
척추골 사이로 허전히 빠져나가는
애증의 물 잦는 소리.
아내여
병 깊은 아내여
우리에게 지난 시간은 무엇이었는가
혹은 七月 하늘 구름섬에 한눈팔고
혹은 쓰린 상처 입고 서로 식은 혀로 핥아주기
아니다 야윈 등 긁고 이빨로 새치 끊어주기
그렇게 삶의 질퍽이는 갯고랑에서
긴긴 해를 인내하며 키워온
가을 푸른 햇볕 속 담홍의 핵과(核果)들로 매달린
그 지난 시간들은
도대체 이름이 무엇이었는가.


성긴 빗발 뿌리다 마는
어느 두 갈래 외진 길에서
정체 모를 흉한(凶漢)처럼 불쑥 나타날
죽음에게
그대와 내가 겸허하게 수락해야 하는 것
그 이름은
사랑인가
어두운 성운(星雲) 너머 세간 옮긴
삼십 년 전 사글세방
또 다른 해후의 시작인가.


*시집, 황사바람 속에서, 문학과지성

 

 

 

 

 

 

윤달 - 홍신선

 

 

뒷목과 괴꼴을 마지막 바수고 나면 동짓달이었다

윤달 들어 수의를 마르는 마을엔 탕약내가 진동했다

석유 등잔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사랑방엔

소싯적 염전에서 소금 구어 팔았다는 장돌뱅이 영감,

앞서거니뒤서거니 쫓아오던 시간 모두 앞세우고

이제는 납관(納棺)할 지난날 허기만을 양손에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고 있다.

말수 준 집안 아낙들

시름 속에 바늘귀를 꼬이고

흐린 불 속에는 조실부모한 누나의 슬픈 마음이 들어서 달그락달그락 흔들린다.

천(千)실 만(萬)올로 무서리들이 풀려내리는

문밖엔 자투리 몇 마로 시린 하늘이 베어져 있다.

 

그래도 어느 마을에선가 방아 찧는 소리가

숨이 턱에 닿았다.

고사를 끝내고 떡목판이라도 돌리는지

서쪽 끝 허공에 묶인 환한 개밥별 둘레엔 가벼운 말소리와

컹컹컹 개 짖는 소리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어찌 겨울 별자리만이 어울리고 모여 있으랴.

첫 장꾼들이 모여가는

새벽녘까지는 골목마다

줄선 시간의 뒤통수들이 싯푸르게 삭막했다.

싯푸르게 어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