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풍장 - 최영철

마루안 2018. 4. 2. 19:58



풍장 - 최영철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윗도리 하나를 척 걸쳐놓듯이
원룸 베란다 옷걸이에 자신의 몸을 걸었다
딩동 집달관이 초인종을 누르고
쾅쾅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다 갔다
그럴 때마다 문을 열어주려고 펄럭인
그의 손가락이 풍장되었다
하루 대여섯 번 전화기가 울었고
그걸 받으려고 펄럭인
그의 발가락이 풍장되었다
숨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려고
창을 조금 열어두길 잘했다
옷걸이에 걸린 그의 임종을
해가 그윽이 내려다보았고
채 감지 못한 눈을 바람이 달려와 닫아주었다
살아 있을 때 이미 세상이 그를 묻었으므로
부패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진물이 뚝뚝 흘러내릴 즈음
초인종도 전화벨도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을
바람이 와서 부지런히 닦아주고 갔다
몸 안의 물이 다 빠져나갈 즈음
풍문은 잠잠해졌고
그의 생은 미라로 기소중지되었다
마침내 아무도 그립지 않았고
그보다 훨씬 먼저
세상이 그를 잊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식아 희야 하고 나직이 불러보아도
눈물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바람만 간간이 입이 싱거울 때마다
짠물이 알맞게 밴 몸을 뜯어먹으러 왔다
자린고비 같은 일 년이 갔다
빵을 꿰었던 꼬챙이만 남아
그는 건들건들 세월아 네월아
껄렁한 폼으로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경매에 넘어간 그를 누군가가 구매했고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기 전
쓸데없는 물건으로 분류된 뼈다귀 몇 개를
발로 한번 툭 걷어찼다



*시집, 찔러 본다, 문학과지성








쉰 - 최영철

 


어두침침해진 쉰을 밝히려고 흰머리가 등불을 내걸었다 걸음이 굼뜬 쉰, 할 말이 막혀 쿨럭쿨럭 헛기침을 하는 쉰, 안달이 나서 빨리 가보려는 쉰을 걸고 넘어지려고 여기저기 주름이 매복해 있다 너무 빨리 당도한 쉰, 너무 멀리 가버린 쉰,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할까봐 하나둘 이정표를 심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댈까봐 고랑을 몇 개 더 냈다

 
그사이 거울이 게을러졌다 빈둥빈둥 거울이 몰라보게 늙었다 침침하게, 쉰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눈을 찡그리고 있다 저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고함을 내지르고 있다 뿌리치고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눈이 자꾸 어두워져 거울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보다 못한 거울이 흰머리를 하나씩 뽑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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