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침묵을 엿듣다 - 조재형

마루안 2018. 4. 2. 19:36



침묵을 엿듣다 - 조재형



나는 고장 난 신호등
당신의 하루를 지켜줄 수 없다
더 이상 나를 준수하지 말기를
상투적인 당신에게 필요한
일탈이라는 이탈
눈감아주는 지금이야말로
계급으로 쌓아 올린 관습을 허물 기회


나는 유쾌한 제한구역
직각으로 쌓아 올린 피라미드라면 불허한다
고함으로 두드려도 열리지 않겠다
어디서나 우대받는 정품은 거부한다
바닥을 전전해본 반품을 우대한다


나는
천기누설을 주름잡는 통치자
마를 날 없는 예절을 지퍼처럼 열어놓는다
오늘의 순서를 관장하는 총구로
당신의 위치를 향해 정조준한다


나는 빈 주전자
쓸쓸한 오늘을 담아 목마른 허식을 적셔주겠어
벌컥 들이마실 작정이면 나를 유의하기를
때로 나는 당신에게
독배다


나는 오래된 길을 기억하는 바퀴
어디라도 굴러 찾아간다
전투적인 비포장을 선호한다
호의호식하는 측근으로 정체되느니
유리걸식하는 중고 타이어로 버려졌으면
당신의 경사대로 추락하게 나를 방치해두기를


나는 눈물로 채운 만년필
애용하려거든 슬퍼할 각오를 다져야
나를 집어드는 당신은 비극의 저자
발굴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한낱 교정되어야 할 비문非文,
폐기처분되었을 시대의 과오


나는 숫자 0
나를 취하는 순간
추수한 과실보다 몇 배가 부풀려지겠다
하지만
성취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당신의 경향으로 나를 포용하기를



*시집,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 포지션








판토마임 - 조재형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했다
미운 사람만 미워했다


입술로 신을 숭배하면서
손발로는 불신을 경배하였다


일삼았던 속임수
나는 나에게 속았다
나는 내가 아니었으므로
관객의 과반을 잃었다





# 조재형 시인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문을 수배하다>,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가 있다. 현재 부안읍에서 조재형 법무사를 운영하고 있다. 시 쓰는 일이 병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을 옮긴다.


시인의 말


詩 없이 견뎌보는 일상 속에서
나는 여전히 시를 찾고 있다. 이것은 지병


가난하게 살다 착하게 떠난 내 친구 기헌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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