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 행성 - 오민석

마루안 2018. 4. 1. 20:45



먼 행성 - 오민석



벚꽃 그늘 아래 누우니
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
참 다정히도 날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
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
연민을 가르쳐준 궁핍의 가시들
오지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준 당신
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잘린 체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그 거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
지금쯤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
혁명의 연기가 벚꽃 자욱하게 지는 저녁에
나는 평안하다 미안하다
늦은 밤의 술 약속과
돌아와 써야 할 편지들과
잊힌 무덤들 사이
아직 떠다니는 이쁜 물고기들
벚꽃 아래 누우니
꽃잎마다 그늘이고
그늘마다 상처다
다정한 세월이여
꽃 진 자리에 가서 벌서자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인동네








슬픈 강은 몸으로 건너는 거다 - 오민석



강연 나가려다 말고
문득 주저앉는다
왜 이렇게 생이 죄다 쓸쓸하냐,
단풍은 상처로 더욱 붉고
그 그늘 아래 길냥이 가족
어디서 주워 온 생선 한 토막 나누어 먹는다
(재들도 엄마, 아빠, 자식들이 있었구나)
나는 치욕의 강을 한번 건넜고
그동안 여러 번 쓰러질 뻔했다
외로움을 옹이처럼 숨긴 늙은 가수가
술잔을 내려놓고 운다
고단한 석양이 그의 눈가에 머무는 동안
나는 내 푸르른 죄를 생각했지


슬픈 강은 몸으로 건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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