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명에 들다 - 허림

마루안 2018. 3. 16. 20:27

 

 

무명에 들다 - 허림


내 머리 위로 북두칠성이 떴다
어둠이 저 별을 내게 보내준 것이다
놀이 지고 저녁이 왔는데 그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사막처럼 메마름이나 목마름으로
내내 걸어야 했으리라
아니 저녁이나 밤이란 말 쓸 줄 모르고
내 눈을 감아
무명을 밝혀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나
여든의 엄마와 상추 뜯어
보리밥에 감자 으깨어 쌈을 먹고
평상에 누워 아득했던 꿈을 뒤적이다가
내 이마 위로 돋아나는 별들을 바라보다가
별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어떤 별에게는 친구의 별명을 붙이기도 하다가
산협 막치미에서 군불을 때며
어린 애인이 중얼대는
서귀포 바람 이야기 떠올리다가
소처럼 웃으며 머리 들 때
내 이마에 와 부딪치는
캄캄한 개구리 울음 같은 어둠
이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또 있는가
가만가만 그 품에 안기는 것이다


*시집, 울퉁불퉁한 말, 시로여는세상

 

 




오지 - 허림


누군가 떠나고
나도 떠나고 싶을 때
혼자 서성이며 떠돌기 좋은 곳을 안다
오래도록 떠돌아도 발자국도 남지 않고
목소리도 남지 않는 곳을 안다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져 찾아가는 곳을 안다
어쩌다 집배원이 다녀가고
강가를 돌아오는 마을버스 돌아나가고
바위 위에 오래도록 앉아
일용할 양식을 기다리는 흰 물새들 바라보며
동박꽃 피는 소리랑
배꽃 피는 소리
다 들릴 만큼 고요한 곳을 안다
혼자 남은 빈자리 붉게 채우는 저녁놀 좋은 곳을 안다
밤새 술 먹고 취해 노래 부르다가
울컥 소리쳐 울기 좋은 곳을 안다
어디서 왔냐
왜  우냐
묻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 곳
그냥 싸는 것이 삶이라는 듯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내보이려 하지 않는 곳
떠나가는 모든 것들 까맣게 잊어버리기 좋은 곳
내 마음의 오지다




# 허림 시인은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92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말 주머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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