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풀밭 버섯 피워 내듯이 - 오두섭

마루안 2018. 3. 16. 20:39

 

 

그 풀밭 버섯 피워 내듯이 - 오두섭

 

 

한 살이라도 더 먹는 건

아무래도 섭섭한 일

 

저 어린 것들 무른 눈동자

촐망촐망 영글어야 하고

새벽 밝고 한낮 뜨거워 저녁이 오면

별들 하늘에서 광년으로 내달려와

그 눈 속에서 빛나야 하고

 

새끼 나무들 건방지듯 쑤욱쑤욱 자라나

성성한 잎 단단한 팔다리 근육 키워서

바람과 새와 달과 별들의 둥지

아름답게 지어야 할 일이고

 

내가 옹기마냥 구부러지며

흙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건

그늘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건

좀 쑥스러운 일이겠지만

 

병상에 누워 약효 키우는 투병의 숨결에

고목 가장 깊은 상처에서 움트는 재생의 씨앗에

열병에 몸 빼앗겨 황홀하게 빠져든 몽유병에

또 그것을 기다리는 모든 것들에게

 

깊이 찔러볼까, 시간의 주사바늘

 

무심히 다니는 그 길섶에 누워 있다가

반짝반짝 피어나는 시간의 소금들이여

하루살이 버섯들이여

내 삶 슬픈 마디마디에 스며드는

링거액 같은

 

 

*시집, 소낙비 테러리스트, 문학의전당

 

 

 

 

 

 

내 생각에 망령 여럿 - 오두섭

 

 

이것들,

나보다 한발 앞서 가는 이것들

벼랑 끝 아슬아슬 매달린 이것

낡은 유곽 주저앉아 술잔 기울이는 이것

해 뜨는 곳으로 난 길을

땅거미로 덮어버리는 이것

노래 흐르는 강물 말려버리고

내 가슴에 미약 묻혀 꽂을

비수 같은 이것

언제나 내 길목 긴 그림자로 숨어

 

어쩌다 사랑 고백이라도 하려면

모가지 중간쯤에서 내 혀를 당기는 것들

고해성사로 구부린 무릎에

꽃방석을 받치고

이따금 내 몸으로 빙의까지 하는

이것들, 이것들

내 안에 둥지를 틀고

새끼까지 치면서

내 삶의 신탁까지 넘보는

이것들 이것들, 이것들

알고 보면 내가 잉태하고 키운

 

 

 

 

# 오두섭 시인은 1955년 경북 호미곶에서 태어나 선산과 대구에서 성장했다. 197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가 당선 되었고 서울예술대학을 다녔다. <소낙비 테러리스트>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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