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제목을 입력하세요 - 이승희

마루안 2018. 1. 24. 19:31



제목을 입력하세요 - 이승희



내 몸 어딘가에 산기슭처럼 무너진 집 한 채 있다면 그 옆에 죽은 듯 늙어가는 나무 한 그루 있겠다. 내 몸 어딘가에 벼랑이 있어 나 자꾸만 뛰어내리고 싶어질 때, 밭고랑 같은 손가락을 잘라 어디에 심어둬야 하는지 모를 때, 늙은 나무 그늘에서 잠들고 싶어, 죽을힘을 다해 꽃을 피우는 일은 못된 짓이다. 죽을힘은 오직 죽는 일에만 온전히 쓰여져야 한다. 당신도 모르게 하찮아지자고, 할 수만 있다면 방바닥을 구르는 어제의 머리카락으로, 구석으로만 살금살금 다니면서 먼지처럼 쓸데없어지자고. 한없이 불량해지는 마음도 아이쿠 무거워라 내려놓고, 내 몸 어디든 바람처럼 다녀가시라고, 당신이 나를 절반만 안아주어도 그 절반의 그늘로 나 늙어가면 되는 거라고.


그러면서 나 살 수 있을까?


내 몸 어딘가에 나 살고 있기나 한 걸까?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시절, 불빛 - 이승희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 속에 손을 넣어 둥근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저 불빛들, 다 길이다. 중얼거린다. 저녁이 산을 가만히 지우는 동안 나는 아무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불빛에 기대면 그늘이 된다, 어둠이 된다. 여긴 마치 물속의 방 같아서 애초 바닥 따윈 없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두려움 따위는 집어치웠던 시절, 몸에 긴 칼자국을 그리던 겨울. 깜박거리던 불빛 같은 핏방울로 달빛조차 붉어보이던. 창문으로 달이 지난 지 오래. 아무 것도 소곤거리지 않는 참으로 편안했던 불안.


불빛에 부풀려진 영혼은 밤새 공중을 떠다니고
달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던 어느 날 붉고 동그랗던 불빛을 기억한다.
그 불빛들
나무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흘러내렸고
아직도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앉은 시절.


남은 반찬을 냉장고 속에 넣고, 불을 켠다. 깨알 같은 글자들로 가득한, 채송화 꽃씨보다 작고 작은 글자들이 무료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비친다. 한 시절이 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 제목 없는 인생에 온기를 불어 넣는 방법은 이렇게 우울한 시를 가슴에 채우는 것이다. 시인은 당신이 절반만 안아주어도 그 절반의 그늘로 늙어가면 되는 거란다. 일단 그 말을 믿고 인생의 제목을 생각한다. 헐,, 그런데 무얼로 제목을 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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