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움, 그것 - 김인자

마루안 2018. 1. 23. 23:05



그리움, 그것 - 김인자



그리움이라 이름하진 않겠다
추위 속에선 가끔 찿아오는 배부름도
궁기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지나고 나면 안다 너무나 사소한 것에
자주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그러니 지나치게 슬픈 것을 견디며
이 길까지 왔다고 말하진 않으리라
절망이 한 곳으로 흘러드는 바람의 공중 정거장
대책 없이 향유한 욕구가 거대한 허상을 만들 때
꿈속에서도 배가 허기가 졌으리라
함께 바람 사막을 걷던 그가 등을 보였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쌓이면
결국 어느 길 끝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첫 생과 마지막 생의 재회를 벗어나는 순간
다시 처음의 자리로 와 있는 우리들
이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목뼈 부러진 엄동의 순간
나를 지배해온 건 내가 아니라 그였을 것이다
그나 나나 부양해야할 욕망이 존재를 질리게 할 뿐인
이 구차하고 옹색한 중년의 틈새도 어차피 지나고 나면
모두 그렇게 헛것이고 부질없을 것 아닌가
속지 않을 것이다
정점은 늘 현재일 뿐 과거나 미래일 수는 없다
비루먹은 개 처럼
단편의 차원조차 넘을 수 없었던 지지부진했던 삶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리움 가득한
그러나 애써 밝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지금의 어둠 또한 불평하지 않을 오늘 여기



*김인자 시집, 슬픈 농담, 문학의전당








정월正月 - 김인자



누군들 한판의 도박을 꿈꾸지 않으랴
모처럼 주머니에 돈께나 든 설 끝에
저마다 꼬이기만 하는 생을 탓하면 한판 거둘 심산이지만
폼 나게 거둔 사람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짓에
마을 남자들 투닥투닥 음담패설 안주 삼아 화투장 던질 때
가끔은 화투판에 끼어 드는 것보다 뒷전에서
판싸움 구경하는 일이 더 재미날 수도 있는 건
세상에 잃을 사람 하나도 없어 저마다 눈이 벌건 그 짓을
웃고 있지만 누가 동지고 누가 적인지를 아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노름판에서 화투패 보여주며
동지를 기대하는 일만큼 무모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잘 먹어도 시원찮을 명절 끝에 빈 막걸리 병이 나뒹굴고
자욱한 담배연기 허한 속을 우롱할 때쯤
아니나 다를까 두어 번 멱살잡이 오고가면
누군가 자리를 엎어야 끝나는 게 노름판의 법칙인데
결국 잃은 사람만 있는 그 판에도 새벽은 오는 법
사내들 주머니를 털듯 어둠을 털고 집으로 돌아간 뒤
달팽이처럼 웅크려 설핏 잠든 시간 얼마나 지났는지
해동하듯 조금씩 등이 따스해 오는 건 보나마나
번번이 한판 어떻게 해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아직도 해동되지 못한 아들의 삶이 안쓰러워 노모께서
새벽 댓바람에 일어나 군불을 지피신 게 분명하다





# 쉽게 읽히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시다. 문학이 은유와 상징을 담고 있어야 하지만 그 고상한 문학성을 독자가 소화하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법, 어려운 시를 좋은 문학인양 주입시키며 힘들게 읽느니 차라리 무협지를 읽겠다. 시는 읽으면 행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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