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옛날 노새가 지나갔다 - 송찬호

마루안 2018. 1. 14. 13:27

 

 

옛날 노새가 지나갔다 - 송찬호


그는 앉은뱅이 키만 한 그 돌이 왜 독재자가 됐는지 끝까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여 그는 마당에 돌을 끌어다
매몰차게 다 파묻진 않고
돌의 이마가 보이게 묻었다

그리고 그가 기르던 토끼의 자치 공화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실패의 상심으로 토끼들이 번번이 죽어 나갈 때
무정한 돌이여,
하고 마당에 나가
돌의 이마를 짚어보곤 하였다

그는 이제 소소한 일과로 하루를 보낸다
들에 나가 감자를 캐고
해바라기를 키우고
부서진 문짝이나 새는 지붕을 고치고
그러다 문득 가슴에 다시 이는 불을 끄다 생각해 보면,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 아니, 아직 오지 않은 것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리 둥치가 구부러진
버드나무 앞으로
느릿느릿 옛날 노새가 지나갔다

 

 

*시집, 분홍 나막신, 문학과지성

 

 

 

 

 

 

화북(化北)을 지나며 - 송찬호


봄에서 가을까지 산간에 흩어져 지내다
겨울이면 산 아래로 내려오는
염소처럼, 동그마니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있었다

어느 해 여름 큰비 왔을 때
마을 위쪽 골짜기에서
폐사지에 묻혀 있던 동종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네 다리가 묶인 멧돼지처럼 종을 번쩍 들어올려 메고 내려왔다

독초와 연애의 구별법도 모르고
마을에서 호올로 자란 아이는
벌써 목소리가 큼큼해져
내후년쯤엔 산적이 되어 있다는 소식을 기대해도 좋았다

나는 멀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길을 지나다
어느 의열단이 버리고 간
육혈포를 주운 적도 있었다
이제 이 산하에는 그것으로 쓰러뜨릴 만한 거목도 없는 듯하였다

속리산 너머 화북 지나
골짜기 아랫마을로 한지를 사러 가던 시절이 있었다
냇가에 살얼음이 하얗게 떠 있던 늦가을 아침이었다

 

 

 

# 송찬호 시인은 1959년 충북 보은 출생으로 경북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분홍 나막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