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는 게 미안하고 잘못뿐인 것 같아서 - 이병률

마루안 2017. 12. 27. 22:08



사는 게 미안하고 잘못뿐인 것 같아서 - 이병률



거미가 실을 잘못 사용하더라도


계절이 한참 지나간 후에도 꽃대가 꽃을 내려놓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리


그조차도 세상의 많은 조합일지니
나의 잘못이 아니리


찬바람이 여름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더라도
그래서 감기로 잠시 아프더라도


정녕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리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당신이 그에게 나머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까지도


생각을 만나지 않고 시장에 간 것
나의 잘못이 아니리
오후에 붙들려서 길을 따라 나선 것은
조금 맨발이 되자는 것이었으니


마음이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 휘감기는 것도
그리곤 구덩이에서 꺼내지는 것도
찬바람이 시키는 계절의 일들일 테니


애써 모른 체한들
이 모든 것 나의 잘못이은 아니리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여행 - 이병률



어느 골목 창틀에서 본 대못 하나
집에 가져다 물잔에 기울여 세워놓았더니
뚝뚝 녹가루를 흘리고 있다


식당에서 먹다 버린 키조개 껍데기
뭐라도 담겠다 싶어 집에 가져왔는데
깊은 밤 쩌억쩌억 비명 소리가 들리기에
두리번거리다 안다
물 밖에 오래 나와 있어 조개의 껍데기가 갈라지고 있는 것을


나를 털면 녹 한줌 나올는지
공기로 나를 바싹 말린 뒤 내 몸을 쪼개면 쪼개지기나 할는지


녹가루를 받거나
갈라지는 소리를 이해하는 며칠을 겨우 보냈을 뿐인데


집에 다녀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토록 마음이 어질어질한 것은 나로 인한 것인지


기어이는 숙제 같은 것이 있어 산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나는 뒤척이면서 존재한다


옮겨놓은 것으로부터
이토록 나를 옮겨놓을 수 있다니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 어느덧 연말이다. 무작정 떠난 서해의 작은 포구로 가는 버스에서 이 시집을 만지작거렸다. 사는 게 늘 미안했던 터라 싯구가 더욱 시리게 다가왔다. 거미가 실을 잘못 사용하더라도 계절이 한참 지나간 후에도 꽃대가 꽃을 내려놓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저 사는 게 미안할 뿐,,,, 사는 게 남는 장사가 아니면 또 어떤가. 올해도 무사히 살아냈음과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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