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고시원 - 이용호

마루안 2017. 12. 26. 22:12



저녁 고시원 - 이용호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이 있다
세상의 정점에서 보면 하찮은 인간들이란
항상 남의 탓을 하며 일생을 허비한다, 너도 그렇다


저녁이 찐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시간
육중한 시멘트 건물을 그림자가 끌어안는다
이 시멘트의 부족들은 하나둘씩 어둠 밑에 일어나
선풍기 바람에 저마다의 운명을 맡긴다
상자 안에서 눈만 껌벅이던 그들의 팔은
어느새 창가에 가느다랗게 걸쳐지고 있다
빨래 하나 널기 위해 고시원 옥상에 기어 올라가
세상 속으로 담배 연기를 날려 보내면
어느새 비치는 옥상의 어둠
바닥엔 낯선 이방인들의
한때 기억이었을 토사물들이 널려져 있다
기억의 살갗들을 걷어내고 고시원의 착실한 미래가 쌓이고 있다
교회당 십자가에는 누군가 한 번쯤은 걸어두었을
후회의 관절이 겹쳐진다, 패배자에게 내리는
은총 같은 저 어둠을 뚫고
저녁이면 굴뚝새들은 새하얗게 날아올라 가
희망 반점 간판 위에서 때늦은 식사를 한다
희망이라는 건 단지
다친 가슴에 반창고를 살짝 얹어놓는 것이다


물속에 저마다의 고향을 가라앉히고 온 사람들
칸칸의 방구석엔 고향 집 느티나무에서 나오는
바람을 그려 넣었으리라
차디찬 수돗물을 겨울에 마시며
매시간 죽은 자들의 후회 같은,
빛도 닿지 않는 고시원 속으로
저녁이 세들 듯 물들어간다.



*시집,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 현대시학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 - 이용호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정암사에 와보니
한때는 내 안에서 타오르던 불꽃이었네 그대는
항상 입으로만 맴돌던
그대에게 향했던 생각들도
한 이랑의 나뭇잎을 흔들며
서서히 말라만 갔었네, 이곳에 와본 건
침묵만이 따스한 경지가 되던 순간순간들
족보 같은 탄가루 휘날릴 때마다
진폐증 걸린 광부 아버지가 그늘을 만들어
정암사 열목어들을 지켜주고 있었네
나도 아버지의 구늘에 살던
한때는 침묵을 비옷처럼 걸어놓던 열목어 한 마리였네
광부들의 삽과 괭이 소리가 하늘을 어루만지고
뒷모습이 아름다운 적멸보궁도 겹겹이 에워쌀 때까지
아픈 다리 질질 끌며 올라가게 하던 저 수마노탑까지도
연꽃들은 오후 한낮에 길게 누워 있었네
이곳에 와보니 지금은 두 손을 내려놓고
서서히 산문 밖으로 걸어나가야 할 때라는 걸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도
이제는 서서히 식어가야 할 때라는 걸
바람의 떨림으로도 알 수 있었네.






# 좋은 시를 만난 기쁨이 이런 것일까. 쉬운 어휘, 깊은 울림, 그리고 삶에 대한 따뜻한 이해까지 깊은 시인이다. 많은 시집을 접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시 두 편이 없어서 내 블로그에 언급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시집이 부지기수다. 이 시집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너무 많다. 시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인의 말을 올린다.


시인의 말


詩에 이르기 위하여 너무 먼 길을 돌아서 왔다
詩가 아닌 것들로 인해 그동안 아파해야 했던 날들
그 시간들이 오늘의 자양분이 되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장명등 켜놓은 노모의 마음처럼
세상 한 자락을 따스하게 비출 수 있는 시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 있음이 곧 고통인 사람들에게
혁명을 대신하여 이 시집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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