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몇 볼트의 성욕 - 이문재

마루안 2017. 12. 27. 22:33



몇 볼트의 성욕 - 이문재



나달나달 옷은 얇아지고
훠어이 훠어이 몸은 헐렁해져 있다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생각과 생각 사이 아득히 멀어져 있고
몸 속으로 들어와 있던 길을 여기 내려놓는다
나는 단순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저기 내려놓은 길이 따라오지 않는다
먹장구름들이 견디지 못하고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축축한 공기 속을 할퀴고 내려가는 빗방울들
빗방울들은 하염없이 중력에 지고 있는 것이다
성난 듯 치솟은 침엽수지대가 안개비 뒤로 물러난다


비 그치자 약간의 허기
그 곁에 몇 그램의 피로
그 곁에 또 한 줌 가량의 외로움
눈부신 초록의 몸을 활짝 열어놓고
나무들이 마음껏 흰 꽃을 피우고 있다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나는 오직 걷는다는 것만으로
이 단순함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이 성욕과 같은 마음의 움직임은
몇 볼트쯤일 것인가
이제 이 맑고 깨끗한 성욕 밖으로는
나가지 않기로 한다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








꽃멀미 - 이문재



봄꽃들은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산이다
만발한 저 어린것들을
앞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 돼지저금통 깨
외출하는 봄날 아침
안개가 걷혔는가 싶었는데
저런 저기 흰 벚꽃
박물관 입구 큰 벚나무
작심한 듯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희다 못해 눈부시다 못해
화공약품 뿌린 듯한 오래된 벚나무
흰빛은 모든 빛을 거부해서 흰빛
가까이 가면 내가 표백될 것 같았다


동창 녀석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왼쪽 구두코에 발자국이 찍혀 있고
웃저고리에서는 아직도 삼겹살 냄새


나트륨 틍 켜져 있는
농업박물관 입구
수확하듯이 흰 꽃잎 두어 장
새벽 한시 근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야임마 내가 이렇게 떳떳한 것은
내가 이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라는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