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소한, 아니 굉장한 꿈 - 이승철

마루안 2017. 12. 27. 23:02



사소한, 아니 굉장한 꿈 - 이승철



나잇살 이슥해 세상사 바라보니
아주 사소했던 것들이 때론 굉장해 보이고
내 젊은 날 굉장타고 집착했던 어떤 것들이
너무나 꾀죄죄하게 다가온다
그 누가 알겠느냐?
인생의 반환점에 돌아선 그에게 꿈이 있다면
아주 사소한, 아니 굉장한 한 토막 꿈이 있다면
아침 나절 그 누구처럼 아무런 해찰도 망설임도 없이
철퍼덕, 된똥 한번 시원스레 냅다 싸질러보는 것임을.


오늘 아침에도 쓰라린 공복을 훑어내리며
엄지발톱 끝에 우주의 기를 한껏 모아쉬며
연 사나흘째 내리 설사에 취해 몽롱해하던
어느 가엾은 인간의 안쓰러움을 나는 보았다
또한 나는 어느 날부터 보고, 또 보았다
남들은 하나도 부족해 둘둘셋씩
쭉쭉빵빵 잘생긴 애인들과 최하 이에프 쏘나타 몰고와
행주산성 민물장어집 그 평상 위에 마냥 퍼질러앉아
오물딱주물딱 인생의 후반기를 스리슬쩍 흘려보내건만
내가 아는 어느 바보들은
한우물만 십 년, 혹은 이십 년씩 붙박이로 치어다보며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스스로를 갈무리하며 살아간다는 겉똑똑이 그 바보들이
나 또한 오늘은 같잖게 보이더라


그대가 곁에 있을수록 나는 그대가 그립지 않다
하늘하늘 코스모스처럼 가냘픈 거웃의 그대여
이쯤 나에게 마지막 수인사를 건네다오
허구헌 날 밑 빠진 하수구처럼 똥줄 하나 가누지 못하는
엉거주춤한 저 인간을 향해
굿바이, 굿바이!
진정 미더울 당신과 나의 내일을 위해
아주 사소한, 아니 굉장한 꿈 하나를 안겨주시압!



*시집,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실천문학사








여직 살아간다는 것은 - 이승철



벗들 죄다 떠나가 버린 들녘 끝 모서리
저 혼자 달려온 사내 하나
눈물 글썽이며
언덕길 구비구비 둘러봅니다
산 그림자 서글피 미소 짓던 날
한시절 목숨 걸고 사랑할 임 한 분 없이
살아 있다는 것은
여직 살아간다는 것은
한밤 아우성처럼 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마음 한자락 가눌 곳 없는 외진 하늘가
죄스런 육신을 밀치며 석양은 저물고
뉘라서,
돌아서는 발자국에 아롱진
상처의 낮과 밤을
차마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습니까?





# 연말이어서일까. 이 시가 눈에 확 들어온다. 모질게 손바닥에 새겼던 다짐도 절반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갔다. 빈 손으로 맞은 연말이 쓸쓸하지만 이런 시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런대로 잘 살아낸 한 해다. 빈 손이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