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 위의 나날 - 김유석

마루안 2017. 12. 25. 12:30

 

 

길 위의 나날 - 김유석

 

 

사막을 건너와서 모래바람과 갈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또 다시 사막으로 간다. 처음보다 적은 물통과 생각, 더

늙은 낙타를 앞세우고

부유하는 물풀처럼

 

걷는다, 처녀림을 헤쳐나가는 일보다

이미 드리워진 것들의 내력을 불러들이며 걷는 길은

몇 걸음 뒤에서 이내 지치고, 쉬어가는 곳마다 벗었다

다시 짊어지는 짐의 무게도 다 다르지만

모래와 바람만으로

수많은 갈래를 긋고, 또 지워버리는 사막

 

초행이 아닌데도

필경 같은 곳에서 길을 놓치는 것은

걸으면서 꿈꾸어야 하는 삶이 사막 어딘가에

서늘한 나무그늘을 감춰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와디처럼

흔적만을 남기는 것들이 태우는 목마름을 안고

저만치 오아시스를 지나쳐야 하는 까닭이다.

 

흘러간 것은 흘러가버린 것, 훗날

선술집 탁자에 기대어 중얼거리게 하는 것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붙잡았던 것들의 신기루일 뿐,

붉은 전갈의 음울한 춤이

황홀한 베드윈족 여인의 화석(化石)으로 통속하기까지 삶은

얼마나 많은 독을 뱉어내야 하는가

 

낙타는 길 위에서도 울지 않는다.

모래였던 것만을 기억하는 모래알들을 밟으며

울창했던 원시림 속을 지나온 사람들은, 또 다시

모래바람과 갈증과 전갈의 별자리를 순례하고

모래알들은 더 잘게 부스러지며 흔적을 지운다.

 

 

*시집, 상처에 대하여, 한국문연

 

 

 

 

 

 

낙타 - 김유석

 

 

너의 고향은 사막이 아니다.
늙은 파계승처럼
타박타박 뜨거운 모래밭을 밟아가는
빈 등이 더 무거운 꼽추여
울음은 삼켜서 갈증을 이기고
꿈을 꾸듯이
눈은 항상 끝없이 먼 곳을 바라보지만
바람과 모래뿐인 세상은
명상 속에 오아시스를 두고
길 없는 길을 건너가는 곳

 

 

 

 

# 김유석 시인은 1960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전북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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