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마루안 2017. 12. 9. 19:15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뿐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물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 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

 

 

 

 

 

 

실패의 힘 - 천양희

 

 

내가 살아질 때까지
아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애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비가 그칠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으므로
나는 홀로 우월했으면 좋겠다


지상에는 나라는 아픈 신발이
아직도 걸어가고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실패의 힘으로
그 힘으로

 

 

 


# 천양희 시인은 1942년 부산 출생으로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