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삶을 놓치고 길을 놓쳐야 나그네가 된다 - 이기철
두껍나루를 지나니 해가 진다
오른편으로 돌면 하동포구
여기가 섬진나루다
종아리 치지 않아도 해거름이 빨라
겨울 하루 저녁 빛이 갓 잦힌 쌀밥 같다
옥곡 지나 광양, 여수 지나 돌산이다
오늘 하루도 벌레처럼 아삭아삭 갉아먹었다
왜 시간은 갉아먹을수록 배고픈가
하루를 구겨 넣은 가방의 무게가 백짓장처럼 가볍다
누가 이 나루를 사랑한다고 돌에 쓰였다
미사여구들이 양치한 이빨처럼 가지런하다
돌은 오래 삭지 않고 깨지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다
산동 답골 진틀, 진례산 영취산 제석산을 버리고
대교를 건넌다
이만쯤서 그만 먼지 같은 삶 하날 내려놓아도 되겠다 싶다
쓰다듬어도 악기 소릴 내지 못하는 그것을
부둥켜안으면 이윽고 돌산
길 위에 서면 참 많은 길과 마을
저 이름 부른 사람들이 진짜 시인이다 싶다
나그네 못 되면 옥죈 하루가 놓아주지 않는다
누구나 삶을 놓치고 길을 놓쳐야 나그네가 된다
*시집, 꽃들의 화장 시간, 서정시학
코스모스역 - 이기철
누가 저 리본 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외떨어진 남녘에 코스모스역이 있다
동대구를 떠나 순천 가는 길
진주 지나 완사, 완사 지나 북천이다
병 나은 햇빛들이 모두 여기 와 옹알거린다
코스모스는 지고 없고 낫에 잘린 꽃대들만 까끄라기처럼 선 코스모스역
저 뒤쪽, 단장한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내 열 살 적 신발 한 짝이
눈물 글썽이며 단짝 동무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이곳이 북천, 팻말에는 이병주문학관, 다솔사 명패가 보인다
청년 김동리가 하늘 원고지에 필묵을 찍던 곳이다
생각은 생각으로 색동옷을 입는다
마음만 내려놓고 몸은 급히 빠져나간 1분이
1시간을 데리고 질긴 끈처럼
내 등을 따라온다
코스모스, 그 많던 꽃잎들은 어디에 제 분홍 저고리를 벗어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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