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누구나 삶을 놓치고 길을 놓쳐야 나그네가 된다 - 이기철

마루안 2017. 12. 10. 18:39



누구나 삶을 놓치고 길을 놓쳐야 나그네가 된다 - 이기철



두껍나루를 지나니 해가 진다

오른편으로 돌면 하동포구

여기가 섬진나루다

종아리 치지 않아도 해거름이 빨라

겨울 하루 저녁 빛이 갓 잦힌 쌀밥 같다

옥곡 지나 광양, 여수 지나 돌산이다

오늘 하루도 벌레처럼 아삭아삭 갉아먹었다

왜 시간은 갉아먹을수록 배고픈가

하루를 구겨 넣은 가방의 무게가 백짓장처럼 가볍다

누가 이 나루를 사랑한다고 돌에 쓰였다

미사여구들이 양치한 이빨처럼 가지런하다

돌은 오래 삭지 않고 깨지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다

산동 답골 진틀, 진례산 영취산 제석산을 버리고

대교를 건넌다

이만쯤서 그만 먼지 같은 삶 하날 내려놓아도 되겠다 싶다

쓰다듬어도 악기 소릴 내지 못하는 그것을

부둥켜안으면 이윽고 돌산

길 위에 서면 참 많은 길과 마을

저 이름 부른 사람들이 진짜 시인이다 싶다

나그네 못 되면 옥죈 하루가 놓아주지 않는다

누구나 삶을 놓치고 길을 놓쳐야 나그네가 된다



*시집, 꽃들의 화장 시간, 서정시학








코스모스역 - 이기철



누가 저 리본 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외떨어진 남녘에 코스모스역이 있다

동대구를 떠나 순천 가는 길

진주 지나 완사, 완사 지나 북천이다

병 나은 햇빛들이 모두 여기 와 옹알거린다

코스모스는 지고 없고 낫에 잘린 꽃대들만 까끄라기처럼 선 코스모스역

저 뒤쪽, 단장한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내 열 살 적 신발 한 짝이

눈물 글썽이며 단짝 동무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이곳이 북천, 팻말에는 이병주문학관, 다솔사 명패가 보인다

청년 김동리가 하늘 원고지에 필묵을 찍던 곳이다

생각은 생각으로 색동옷을 입는다

마음만 내려놓고 몸은 급히 빠져나간 1분이

1시간을 데리고 질긴 끈처럼

내 등을 따라온다

코스모스, 그 많던 꽃잎들은 어디에 제 분홍 저고리를 벗어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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