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랜 유전 - 조성국
당신 밥마저 덜어주며
체하지 않도록 등도 다독거려주던
애비의 눈치를 보았다
무심코 밥알 흘릴 때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애비의 종주먹에
떨어진 밥풀떼기를 급히 주워먹던 습속이
빈번하게 발동되곤 하였다
몇 날 며칠 잠 안 재우며 취조하던
대공분실 조사실에서 국밥을 먹으면서도
아내가 될 여자의 부모와 첫 대면하는
한정식집에서도, 나이답지 않게
뇌출혈로 급사한 친구의 초상집에서도
무연히 흘린 밥알을 즉시
손끝에 찍어 입 속으로 넣던 내가
여느 날과 같이 잔업 마치고 늦은 밥상에서
코훌쩍이 아들의 이마를 향해
잔뜩 힘을 준 종주먹을 냅다 뻗었는데
그보다 훨씬 빠른 것은
제 이마를 팔뚝으로 가로막고
밥알을 잽싸게 주워 먹는 녀석의
날랜 동작이었다
*시집, 슬그머니, 실천문학사
밥 한 그릇 - 조성국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증심사 가는 길, 배고픈다리 건너
산벚나무 환한 초가 평상에
마주 앉아 못다 먹던 보리밥이 선연하네
유리공장 월급 받아 지갑마저 두둑한 오늘,
혼자서 연신 따르는 낮술 잔에
흰 꽃잎 마냥 져도
풋고추 열무 쌈을 푸지게 먹던
그날이 안 잊히네
언제쯤 고봉의 밥을 다시 먹을 수 있을까, 되묻던
그 목소리 아직도 둥근 귓가에 생생하네
사흘 굶고 하루 먹으며
지지리 궁상 떨던 잠행의 시절,
한 번도 원망한 적 없는 밥 한 그릇이
그리도 가슴에 얹혀서 빈 약속만 했던가
오늘만큼은 낮고 귀 빠진 밥상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밥 한 그릇 다 비울 수 있다면
바람으로든 꽃잎으로든
낮술에 불과한 어깨 겯고
옛 혁명가의 한 소절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며
가풀막 산문 밖을 걸어나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
사무치고 사무치네
*김추자의 노래 <꽃잎>에서.
*시인의 말
십 년 하고도 또 십 년을 애돌아서 다시 여기에 돌아올 수 있었던 내가 퍽 다행스럽다. 멀리 우회하는 동안 바래고 찢겨버린 내 삶이 너무 남루해 부끄럽기도 하였지만 괜찮다. 비록 뜨겁진 못했어도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것들을 욕보이지 않고 견뎠다. 애돌기는 했을지언정 투항하지 않고 버텼다. 들척지근 어림할 수 없고 물색없지만 예전에 사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하여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견디는 것이 쉽지만도 부질없는 것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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