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변두리 - 이귀영

마루안 2017. 12. 9. 18:56



변두리 - 이귀영

 


유행을 입은 아이들은 배꼽티를 입고
중심 깊이를 보이고 있다
나의 중심은 정면에서 봐도 측면에서 봐도 비뚤한 몸
모딜리아니 잔느처럼 갸우뚱한 얼굴 긴 목
온몸이 휘어졌다
사물을 볼 때 갸우뚱한 이 슬픈 15도 각도는
너를 만났을 때부터 나를 중심으로부터 밀쳐놓은 것
중심이 움직여 꽃바람에 실리고 비바람에 실려 간다
중심이 움직이니 무엇이나 중심
밥이 중심이고 글자가 중심이고 척추는 신발이 중심이다
입술이 중심이고 용천(涌泉)이 몸의 중심이기도 하다
빈 지갑이 뇌리의 중심이고
진동 없는 핸드폰이 마음의 중심이고
너를 기다리는 식은 커피가 불은 라면이 중심이기도 하다
라벨의 볼레로가 여름을 태우는 중심이고
깊은 겨울땅은 민들레의 중심이다
아이가 세상의 중심이고 울음은 웃음의 중심이고
장미는 가시가 중심이다
눈동자가 없는 눈은 영혼이 중심이듯


변두리에서 맴도는 너는 나의 중심
가장자리인 너 나는 변두리가 편하다 벽이 가까우니까



*이귀영 시집, 그린마일, 한국문연








그린마일 15 - 이귀영
-길



멀리 멀리서 바라보면 다 비극인데 다 초록인데
가슴 웅덩이에 하늘 空이 와 앉는다


더 딱딱한 빵을 먹어보지 않고 천천히 살아온 너
구르며 구르며 울지 않고선 너는 아직 죽지 마라


마주할 의자와 차 한 잔이면 족하거늘
세상 것이 내게 너무 많다 아무것도 아닌 내 것들


한 발은 순간을 한 발은 최후를 위해 길을 내딛는다;
푸른 햇살 푸른 새들 푸른 열매 익는 푸른 나무 푸른 하늘 아래
마지막 힘으로 독한 사랑에 빠지는 거다
두 마리 새가 노닐다가 깊은 허공에 빠지는 것처럼


우리가 춤추는 여기가 낙원이 아니라고 하라
여기가 아닌 그곳으로 나무가 걷는다
폭풍을 안고 나부끼면 사물들은 마구 달아나고
희극은 마구 달아난다 나는 마구 달아난다
시린 뼈가 드러난다


길이 패였다 아스팔트 횡당보도가 닳았다
단단함을 밀어낸 발자국들


길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 시집 첫장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시집 제목이기도 한 그린마일에 대한 설명이다.


그린마일은 사형수가 감방에서 사형집행장까지 걷는 길이다.

즉 한계적 상황의 길이다.

잘 살아가는 건 잘 죽으려 가는 것 일하며 가고 배우며 가고 사랑하며 간다.

마지막 한계시점까지 오늘이 최고의 날 최고의 순간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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