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 심보선

마루안 2017. 12. 8. 20:02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 심보선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애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간혹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꽃말의 뜻을 꽃이 알 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
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었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진리가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착각 - 심보선



구름이 내게 모호함을 가르치고 떠났다
가난과 허기가 정말 그런 뜻이었나?
나는 불만 세력으로부터 서둘러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대들은 나의 영원한 동지로 남으리
우리가 설령 다른 색깔의 눈물을 흘린다 한들
굳게 깍지 꼈던 두 손이 침착하게 풀린다
좋은 징조일까?
그러나 기원을 애원으로 바꾸진 말자
붙잡고 싶은 바짓가랑이들일랑 모두 불태우자
깃발, 조국, 사창가, 유년의 골목길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
지나가던 여우가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그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있는
너 또한 하찮아지지 않겠니?
지금은 원근을 무시하고 지천으로 꽃 피는 봄날
그렇구나, 저 멀리 까마득한데
벚꽃은 눈 시리게 아름답구나
여우야, 나는 이제 지식을 버리고
뚜렷한 흥분과 우울을 취하련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저 꽃은 네가 벚꽃이라 믿었던 그 슬픈 꽃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나가던 여우는 지나가버렸다
여기서부터 진실까지는 아득히 멀다
그것이 발정기처럼 뚜렷해질 때까지 나는 가야 한다
가난과 허기는 또 다른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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