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칼날 위의 세월 - 안상학

마루안 2017. 12. 10. 18:28



칼날 위의 세월 - 안상학



아침이 두려워
새우잠
별 하나 품고
화석처럼 굳어버렸으면


칼날 위의 세월
빚쟁이처럼 찾아오는 아침
두려워
처음 냇물을 건넌 아이처럼
밤에서 밤으로 훌쩍 건너
안도의 한숨 쉬며
새우잠
별빛 하나 품고
삼엽충처럼
또아리를 틀고
밤의 단단한 껍질 속에서
한 시대를 지냈으면
먼 훗날
돌도끼에 선뜻 잠 깨어
아침에도 빛나는
별 하나 낳았으면
별은 별을 낳고
별이 또 별을 낳았으면
연체이자처럼 별들이 별들을 낳았으면



*시집, 안동소주, 실천문학사








가리봉역 - 안상학



창가에 서서 젖은 나를 바라본다
비는 내리고 멀리 아파트 불빛
누군가 편지를 쓰는지 젖은 별 하나로 떠 있다
세상에 한 줄기로 흐르는 강이 있을까
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는 애틋함이 있을까
그리 오래 가지 않는 내 사랑
먼길 떠나는 사람에게
자장면 한 그릇 사주지 못했다
그리움과 기다림만으로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기차가 오고 가고 사람들은
젖은 어깨를 훔치며 들어오고 또 한떼의 사람들은
우산 펴들고 젖은 거리로 나선다
80년대, 90년대, 아니면 21세기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한 인간의 사랑이
한 시대의 사랑으로 흐르기에는 멀기만 한 것일까
젖은 편지를 쓰던 공장의 불빛
하나 둘씩 어둠 속으로 묻히고
세상은 여전히 아침을 기다리는 꿈을 꾸고 있다
그 위로 비는 내리고
역사에 서서 나는
젖은 나의 두 모습을 바라본다
우산을 펴고 거리로 나서는 나와
우산을 접고 기차에 몸을 싣는 또 하나의 나
내일은 어느 곳에서 어느 내가 아침해를 맞을 것인가
멀리 기차가 불빛을 앞세우고 더듬더듬
길을 찾으며 오고 있는 게 보이는데 나는,